조안 러프가든,
『변이의 축제: 다양성이 이끌어온 우리의 무지개빛 진화에 관하여』서평
청년담론 정경직
이 책의 저자 조앤 러프가든은 생태학자이며, ‘다양성’이 주된 연구분야이다. 그에 따르면 다양성은 진화 과정의 안정성을 부여하며, 동시에 이분법을 넘어서면서 다양한 젠더표현과 섹슈얼리티가 ‘생물학적’으로도 중요함을 주장한다. 동시에 저자는 기존의 학계가 다양성을 억압하고, 거부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으며 이를 고발하고자 한다.
러프가든의 주장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단순히 동물계에서 관찰되는 젠더와 성의 변이를 이유로 이런 변이가 인간에게도 좋다고 주장하는 나이브한 관점을 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러프가든은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에도 주목하지만, 동시에 그 차이를 잊지 않으며 더욱이 동물이나 인간이 생물의 한 ‘종’에 불과하며, ‘종’적인 특성에 의해 발현되는 고유한 층위의 영역을 고려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사이비 진화생물학의 주장처럼, 사람과 동물이 직접 비교될 수 없다. 사람들조차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게 되면 삶의 체험을 비교할 수 없는데, 사람과 동물의 무비판적인 비교는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주장이다.
통념적으로 이해된 생물학은 다윈의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론에 기반해 있는데, 여기에 큰 오류가 있다.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분자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 다양성은 병리화 된다. 즉 차이가 질병으로 간주된다. 러프가든은 다윈의 진화생물학의 통찰을 계승하면서, 오류를 교정하고자 한다. 진화 생물학의 중요한 주장은 ①종들은 공통의 조상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관련되어 있다. ②종들은 자연선택을 통해 변화된다. ③암컷과 수컷은 보편적인 틀, 즉 활동적인 수컷과 수줍은 암컷이라는 도식을 따른다. 로 요약된다. 러프가든은 ①,②를 계승‧발전하면서 ③의 심각한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다윈의 성선택 이론의 대안으로, 러프가든은 ‘사회적 선택이론(Social selection)’을 주장한다. 러프가든의 이론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동물들이 번식 기회를 갖기 위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번식 기회를 일종의 ‘통화’로 삼음으로써 상호 협조를 위한 생물학적 ‘노동시장’을 마련하는 존재로 여긴다. 때문에 동물들은 번식을 위한 자원을 진화시키고, 생활하고 새끼 기르기에 안전한 장소를 관리할 수 있는 집단에 속하는 데 적합한 특성들을 진화시킨다. 러프가든은 이렇게 단언한다. “생물학적 무지개는 생명체를 간단한 범주에 끼워 넣으려는 어떤 시도도 제지한다. 생물학에는 생물종의 주기율표가 없다. 생명체는 우리가 구성하는 범주의 경계를 넘어 흘러다닌다. 생물학에 관한 한, 자연은 범주를 혐오한다.”
생물학계에서 다양성에 대한 견해는 긍정측과 부정측으로 나뉜다. 러프가든은 긍정측에 속할 뿐 아니라, 부정 측의 주장이 완전히 문제가 있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러프가든의 견해는 ‘무지개’, 즉 다양성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무지개는 시대와 장소, 변화하는 조건에 따라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들의 저장고다. 다양성을 부정하는 측은 유전자 풀에 ‘해로운 돌연변이’, ‘나쁜 유전자’들이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엘리트 유전자를 믿으며, 다양성을 억압하는 입장을 취한다.
실제로 다윈은 무지개의 가치를 좋게보기도 하고 싫게 보기도 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종을 진화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선택이 변이에 의존하므로 무지개가 종의 미래를 구성하는 가능성의 스펙트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동시에 다윈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수컷과 암컷의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유전자들을 평가하고 위계 지으려 했다.
논의를 따라가 보면, 실제로 생물계의 많은 종은 성에 의하지 않고, 암컷 만에 의해 번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무성 생식은 재빨리 번식할 수 있기에, 치사율이 높은 서식지에서도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나 성이 없이 복제로 번식하는 종은 진화상의 막다른 길이다. 복제에 가까운 번식은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유성 생식은 개체군의 증가율은 무성생식의 절반수준이다. 대신 유성생식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생존해 나간다. 환경 변화가 예상될 때는 유성생식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관점에서 성의 이익은 ‘번식’ 자체가 아니라, ‘무지개와 다양성’에서 나온다. 번식의 관점에서만 보면, 오히려 무성생식이 더 빠르게 개체군을 증가시키며 번식할 수 있다. 그러나 성에 의하지 않고 번식하는 종은 무지개가 좁다. 성에 의한 번식은 유전자의 섞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물학 내에서도 이러한 유전자의 섞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눠진다. 한 쪽은 이런 유전자의 섞임을 통해, 나쁜 유전자를 지속적으로 솎아낸다고 보는 관점이다. 반대 쪽은 저자의 관점이자, 다양성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이론이다. 다양성 억압 이론의 관점에서 성은 해당 종의 유전적 품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성은 해로운 돌연변이를 골라내 재구성하여 그 종의 가계에서 나쁜 돌연변이가 없는 새끼가 태어나게 함으로써 위험을 상쇄한다. 이들에 따르면, 무성생식은 이러한 과정이 불가능하므로, 나쁜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멸종하게 된다. 결국 이 관점은 성을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들에게 성의 목표는 ‘좋은 유전자’이고, 다양성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성 억압이론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경험적으로도 허황된 것이라 비판한다. 무성생식이든 유성생식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자연선택의 압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성생식이나, 유성생식이나 계통 전체의 질은 나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무성생식 종이 장애를 점진적으로 축적하거나 기능을 상실했기에 멸종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성의 기능이 다양성을 솎아 내는 것이라고 살짝이라도 양보하게 되면, 전혀 과학적 지위를 얻지 못한 견해가 된다. 저자는 기본 전제로서, 종의 다양성, 생물학적 무지개가 좋다고 간주한다. 다양성 덕분에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조건에서 종이 생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의 목적을 무지개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러프가든의 주장은 기존 생물학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속 시원했다. 게다가 사회학도의 관점에서 러프가든의 특이한 점은 기존 ‘섹스’와 ‘젠더’의 개념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처음 러프가든이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사회적 범주’와 ‘생물학적 범주’를 구분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성별로서의 ‘젠더’와 생물학적 성별로서의 ‘섹스’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어갈수록 러프가든의 새로운 관점에 친숙해지게 되었다. 러프가든은 생물학자로서, ‘수컷’과 ‘암컷’을 구분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벌레에서 고래에 이르기까지, 홍조류에서 미국삼나무까지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는 오로지 ‘생식세포의 크기’에 차이와만 관계된다.
그에 따르면, 한 종에서 작은 생식세포를 만드는 종은 ‘수컷’, 큰 생식세포를 만드는 종은 ‘암컷’이다. 생식세포의 크기라는 구분 외에는 서로 다른 종의 ‘수컷들’ 혹은 ‘암컷들’ 사이의 공통점은 없다. 다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을 초월해 존재하는 어떤 특질들 예컨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암컷을 쟁취하는 ‘수컷 본능’ 또는 암컷의 ‘모성 본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한 공통적인 종 내의 ‘생식세포 크기의 차이’ 또는 ‘종적인 차이’ 뿐이다.
생물학에 문외한인 내 입장에서는 이분법적인 암, 수의 구분이 가능할 만큼 생식세포 크기의 차이가 종마다 반드시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저자는 나의 의심을 마치 예상한 듯이 이에 대해 설명해준다. 조류, 균류, 원생동물의 일부 종은 생식세포의 크기가 모두 같지만, ‘교배형’ 개체들의 생식세포의 크기는 하나는 매우 작고, 다른 하나는 매우 크다. 생식세포의 크기가 세 가지 이상인 다세포생물은 아주 드물며(이들은 대부분 단세포 생물과 다세포 생물의 경계에 있는 생물들이다.), 생식세포의 크기가 연속적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게 생식 세포의 크기가 고착된 이유는 교배형의 짝짓기 전략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아직 더 연구되어야하는 분야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해한 것은 ‘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특징을 지닌 수컷과 암컷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단 점이다. 오히려 다양한 생물종들은 종마다 고유한, 그리고 매우 다른 특질들을 지닌 ‘수컷’과 ‘암컷’인 것이다.
이어 러프가든은 ‘젠더’ 개념에도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동안 젠더를 생물학적인 섹스와 대비되는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때 사회는 인간-사회를 의미하고, 섹스는 생물학-자연을 의미하게 된다. 즉,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에는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고,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변경 불가능한 섹스와 사회적이고, 구성적인, 변동 가능한 젠더로 이분화 되었다. 때문에 젠더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러프가든은 대담한 제안을 한다. 젠더의 의미를 넓혀 인간 이외의 종에게도 ‘젠더’를 적용하자고! 러프가든은 젠더를 성화된 생물체의 외모, 행동, 생활사라고 정의한다. 러프가든의 젠더 개념은 외모와 활동은 물론이고, 생물체가 색과 형태를 비롯한 외형적·행동적 특성을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성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양식까지 포괄한다. 이때 러프가든의 젠더 개념은 섹스/젠더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으며, 동물/인간, 자연/사회의 이분법 또한 동요시킨다. 게다가 러프가든의 개념은 젠더 개념이 갖고 있었던 ‘구성적’ 측면, ‘수행적’ 측면을 포함하며, 소위 ‘물질적’ 측면까지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러프가든의 젠더 개념은 현대적인 포스트휴먼 논의 또는 신 유물론적인 통찰들과 공명한다. 러프가든의 연구에는 인간 이외의 수많은 종들에서 얼마나 다양한 ‘젠더 표현’과 다양성이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많은 생물체들은 평생 한 성별로 살지 않는다. 수컷과 암컷 간의 크기도 종마다 다르다. 수컷이 임신을 하는 경우도 많고, 둥지를 돌보는 경우도 흔하다. 성별은 XX, XY 염색체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알이 자랄 때의 온도에 따라 성이 결정되기도 한다. 암, 수의 외형적 특징을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흔하다. 수컷이 암컷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종들은 암컷이 수컷을 통제하기도 하며, 많은 종들은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번식한다. 평생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종은 드물며, 종에 따라 두 성 모두, 또는 어느 한 성만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일처제를 행하는 종 내에서 암컷이 주도적으로 이혼을 하여 더 상위의 수컷을 얻기도 한다. 결국 러프가든이 제공하는 풍부한 사례들을 접한 뒤에는 결코 ‘수컷답다’, ‘암컷답다’ 따위의 말을 고유한 ‘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로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굳이 수컷과 암컷을 강조할 이유도 없다. 다시 반복하지만, 수컷과 암컷을 가르는 생물학적 기준은 그저 ‘생식세포의 크기’일 뿐이다. 생식세포의 크기는 우리에게 생물학적 본질, 특질, 본능 따위의 틀로 통용되던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생식세포의 이분법은 교배종에게 꽤나 보편적이지만, 수컷과 암컷의 기능들이 개체들의 몸속에서 구현되는 방식. 예컨대 호르몬, 유전자, 염색체, 생식샘, 생식기 등은 이러한 이분법에 거의 들어맞지 않는다. 게다가 자연계의 다양한 생물들은 생애시기에 따라 자웅동체, 간성, 성 바뀜(Sex change), 크리스 크로싱(Crisscrossing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오는 현상)등을 겪는다. 즉 다양한 생물들에게는 이미 수많은 젠더가 존재한다. 여러 개의 젠더, 유연한 성 정체성, 생태적 맥락에 따라 변하는 젠더의 사회적 구성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동물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결국 우리는 그동안 친숙했던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 개념이 얼마나 문제적이었는지, 구체적인 생물종들에 대해 다루는 ‘생물학적 지식’에 얼마나 무지 했는지를 동시에 깨닫게 된다.
글의 초반부에도 이야기했지만, 러프가든의 주장은 단순히 수많은 생물들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젠더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많은 생물들은 각각의 종에 따라 고유하고도 다양한 무지개를 지녔으며, 인간 또한 그런 고유한 무지개를 지닌 종들 중 하나이다. 게다가 인간들의 사회는 동물들의 사회와는 달리, 복잡한 언어, 추상적 개념, 고유한 문화와 역사, 다양한 사회적 장치 등을 지닌 더욱 복잡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생식세포의 크기로 정의되는 수컷/암컷의 섹스 구분은 다양한 인간들의 젠더 표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러프가든은 수많은 생물학자들이 편견에 둘러싸인 채 생물들을 바라본 것처럼 과거의 인류학자, 사회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꼬집는다. 결국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사회의 젠더는 역사·사회적으로 변동되는 ‘남성성/들’, ‘여성성/들’ 또는 굳이 이런 표현을 빌리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젠더의 향연이다. 그리고 생물들의 역사는 ‘다양성’이 주인공인 무지개 빛 <변이의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