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지식인인 '나'가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행랑아범 화수분 가족의 비참한 삶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보고하고 있다. 특히 화수분 내외의 사람됨과 그들의 고난을 작가는 조금의 주관도 섞지 않고 냉정하게 서술해 내고 있다. 이는 자연주의적 수법이 분명하다. 그러나 작가는 어린 자식을 살리기 위해 화수분 내외가 꼭 껴안고 죽는 장면을 통해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그들의 역경과 비극적 결말에 동정함으로써 인도주의적인 경향을 짙게 풍긴다. 이는 기독교인인 작가의 또 다른 모습이 구현된 것임에 틀림없다.결국 '화수분'은 1920년대 공통의 소재인 가난에 의한 죽음의 서사시적 이야기며 궁핍한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인도주의와 자녀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여기서 자녀애를 지닌 부모들의 죽음이 몰고 오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기독교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부부의 죽음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있던 어린애 옥분의 생존은 바로 죽은 부모들의 부활이요, 재생이라고 해석할 때 늘봄의 죽음관은 비로소 기독교 교리에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을 '화수분'이라고 한 것부터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 듯이 '화수분'은 보배의 그릇으로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암만 써도 줄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로 작가의 창작 의도속에 이미 주인공 화수분이 영속적 생명이요, 변화와 발전의 상징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으로 초월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와 같은 신인적(神人的) 존재의 십자가가 필요하게 된다. 이 십자가를 진 것은 화수분 내외였으며, 그 죽음을 통해야만 새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새생명의 인자는 구조되는 어린애 '옥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