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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조화 - 심미적 경험의 파장
문광훈 지음 / 아트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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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시원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화창해지기도 먹먹해지기도 한다. 도서관 한켠에서 문광훈 선생님(나는 내가 진실로 좋아하는 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를 강요할 뜻은 없다)의 글을 읽고 있다. 그는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담긴 고요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문득 그의 글도 베르메르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 역시 화려하지 않은 절제가 있고,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소중함을 잡아내는 세심함이 있으며, 번잡한 세상을 초탈하게 하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주는 베르메르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도 비슷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짧은 칼럼이건, 긴 글이건 일상의 감각을 정갈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차분한 문체가 좋고,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좋다. 최근에는 느림, 여유, 화의 절제 등을 강조하는 책들이 자주 보인다.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해가고, 그 속에서 점점 더 불안과 소외를 느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들이다. 이런 주장들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절제가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실존적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현실의 상황을 외면하고 초월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다소 허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나오는 사내처럼 현실의 시끄러움을 벗어나 자연의 평화로움을 마음에 담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가능할까. 스콧 니어링의 삶이나 종종 들려오는 귀농자의 삶에 대한 예찬은 오히려 현실의 긴박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수 사람들의 절망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문학과 예술은 “날것으로의 현실”을 대변하기보다는 이를 가리거나 억압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현실을 대변하는 문학과 예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은 거대한 위선의 중심에서 고상함으로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는 이러한 사회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다) 문광훈은 예술이 주는 심미적 경험과 성찰성의 도덕적 실천적 힘을 신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감각의 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의 고립, 삶의 의미의 상실,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고요한 한줌의 빛을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예술과 문화란 교양으로 강요된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자신을 포함한)의 그림, 음악, 사진, 글 등을 통해 자신의 진실성,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즐거운 경험임을 말한다. “고요는 명상 속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일상의 소음 가운데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예술의 빛나는 순간은 스쳐가는 누구나의 삶의 순간에 편재하는 것이다. 삶에서 찾아낸 “심미적(추악함까지도 포괄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무덤덤하고 협소해진 개인의 삶의 지평을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이를 다른 사람과 나눔으로써 사회를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믿는 듯하다. 내가 그의 글을 통해서 어떤 설레임을 얻고, 삶의 쓸쓸함을 견뎌낼 힘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예술과 문학의 “숨은 조화”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내가 그의 글을 감히 타인에게 권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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