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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ㅣ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진과 유진.
같은 유치원을 다니며 유치원 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두 명의 이유진.
큰 유진은 사랑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해준 부모 덕에, 무릎 흉터가 희미해지듯
그 사건을 받아들인다.
반면 작은 유진은, 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잊을 것을 강요하는 부모로 인해, 유치원 시절의 기억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작은 유진의 잠재된 기억은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 내가 문제가 있어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게 만든다.
중학교에서 다시 만난 두 유진. 큰 유진으로 인해 작은 유진이 기억을 찾고
상처를 치유해가고 부모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책.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놈을 죽이고 싶었어. 네 아빠도 그 놈을 죽이러 가겠다고 펄펄 뛰었어."
나는 눈을 감고, 엄마의 눈물에 섞여 마음속으로 흘러든 그 말이 손길이 되어 여기저기 패이고, 긁히고 멍이 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을 느꼈다.
그랬구나. 우리 엄마랑 아빠도 그랬구나. 그 일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놈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놈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구나. 내게 진작 알려 주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저려왔다.
"용서해 줘, 유진아. 엄마가 널 끝까지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그래. 널 위해서 그 일에서 빠지고, 그 일을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생각했던 건 거짓말이야. 날 위해서였어.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널 윽박질러서, 네 기억을 빼앗았어."
..........
그랬어도 운명은 내게 큰 유진이를 보내 내가 그 일을 알게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때로는 상처가 덧나 아프고 힘들더라도 내가 기억하면서 아물게 하는 편이 나았다. 희정언니의 말처럼 훈장으로 삼든, 기운 자국으로 삼든 내가 내게 일어난 일을 겪어 나가는 모습을 내 편이 되어 함께 지켜봐 줬어야 했다.
1. 몇 명의 또래 여성들과 자신이 가진 성추행 경험에 대해 수다를 떤 적이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크고 작은 성추행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극도로 끔찍한 경험에 대해서는 고백하기 힘든 자리였던 만큼, 언급되지 않은 경험들도 몇 몇은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문제는 그런 경험으로 인해 삶이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은 내가 또는 나의 소중한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 무겁지도 않고 필요 이상 심각하지도 않으면서도, 또 가볍지 않고 회피하지 않으며 유아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부모에게, 모든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다.
2. 큰 유진과 친구 소라의 우정. 작은 유진이 마치 샴쌍동이 같다고 할 정도로 붙어다니며.. 이성친구를 비롯한 모든 중요한 것보다 더 중요하게 우정을 첫 자리에 놓는 아이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죽는 날까지 첫 째로 놓아야 할 절대가치가 우정이라 생각했지.
얼마 전, 편지함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고등학교 시절 편지들을 몇 장 꺼내보았다.
한 친구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코팅해서 보내주었던 게 있었다.
누렇게 색이 바래긴 했지만, 메모판에 붙여 놓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관심사가 달라져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 같다.
3. 큰 유진과 같은 유치원을 보낸 건우. 중학생이 되어 서로의 남친 여친이 됐다.
건우 엄마는 여성운동가. 큰 유진 등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여성단체니 신문사니 사방팔방 쫓아다니는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건우가 큰 유진이를 사귄다 하자, "그런 애랑 사귀지 마라. 그런 애는 문제가 있다"며 아들의 교제를 말린다.
문제는 그런 건우엄마조차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한데 슬슬 드는거다.
자신의 그런 경험에 대해 당당할 수 있는 것, 타인의 그런 경험에 대해 드팀없이 '옳은 관점'으로만 대할 수 있는 것..
나부터, 우리부터 그래야 겠지.. 일상적으로 요구된다.
이 세상에서 모든 차별과 싸우고 살기 위해.. 참 섬세하고도 강인한 실천이 숨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