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하는 인간
정소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의 화자들은 모두 입으로는 실수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양장 제본서 전기’에서 화자인 영지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실수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책으로 만들어 처분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책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어머니는 집이 되어 가고 있고, 영지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실수하는 인간’에서 석원은 늘 ‘삐끗’하며 실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수하는 인간들은 그를 ‘얕본’ 사람들이었다. 모든 실수들은 그에게 행운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집 뒤편에 실린 평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소설들의 부모들은 부재하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 폭력에 맞서는 화자들은 이미 그 위협적인 시기를 지난 이들이다. 그들은 웅크리고, 도망치고, 숨다가 또다른 가해자가 된다. 그들의 심성을 지배하는 건 어떤 죄책감이 아니라 ‘체념’이다. 석원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긴 적이 없어서였다. 그는 다만 그의 여동생이 어쩌다가 욕이나 하는 아이로 변해버렸는지 안타까워한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그는 여동생을 탓할 수도 없고 자신의 비운을 한탄할 수도 없다. 그저 묵묵히 안타까워하며 전화를 끊을 뿐이다.

 ‘빛나는 상처’에서 ‘나’는 부모와 집을 기억과 함께 잃어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어머니를 고의로든 실수로든 ‘상실’한 뒤 누구든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나’를 안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치지도 못한다. 그저 주변을 빙빙 돌며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자신이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냐고 묻는 남자에게 ‘도리어 자신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맞받아친다. ‘나’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떤 것에도 기억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했던 건, 그 묘한 공동체였다. 온기와 유대를 그 누구보다도 필요로 하고 절실하게 살아남으려 했던 아이들의 공동체. 

 ‘이곳에서 얼마나 먼’이나 ‘폐쇄되는 도시’, ‘돌아오다’는 사실 뻔한 공식의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얼마나 먼’의 경우 제인에 대한 집착이 ‘제인이 내 삶을 망치고 있다’라는 피해망상적인 상상이 되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된다. 하지만 제인이 그녀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갑자기 허둥거린다. ‘폐쇄되는 도시’의 경우 김중혁의 서사와 왠지 닮았고, ‘돌아오다’는 말 그대로 딸에게 돌아오는 어머니, 모든 과거들이 다시끔 돌아와 미래를 구성할 수 있는 ‘집’을 그린다. 

 어찌 본다면 ‘실수하는 인간’에서는 과거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고 볼 수 있겠다. 그들은 과거를 계속 중얼거린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의 가능성은 상실되었으며, 그들에게 남은 건 과거를 곱씹고 회상하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뿐이다. 생각에 잠겨 땅만 보고 걷다가 ‘사다리를 발로 차는 등’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우리가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실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란 막연하고, 모든 것이 한없이 낯설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지나간 미래’야말로 이러한 작가의 시간관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화자는 자신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남편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가 미래라고 생각했던 환상들은, 사실 과거의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철장에 갇힌 채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진짜 미래라고 믿었던 것은 무너지고, 진정한 미래가 다가온 순간 그녀는 ‘과거를 곱씹으며 서울역에 있었던 것’이 훨씬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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