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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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진은영 시는 아름답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그렇다. 문학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마냥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도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다르게 말하면, 문학에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쓸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진은영 시인이 썼던 시어들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그 세계가 스스로 운동하는 유기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던 것으로 읽힌다. 비유와 상징이 절묘하고, 언어는 유려하다.

어찌 보면 진은영 시인은 2시집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비로소 완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1시집에서 보여주었던 미완성, 미완결의 언어가 완성되고 완결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물론 1시집의 그것보다 훨씬 더 무르익었지만, 그것은 완성이나 완결과는 다르다. 오히려 진은영 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를 더 모르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에 대해 쓰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이 보이는데, 원래 시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스스로 다 알고 있는 것을 쓰고 있고, 시인 스스로 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은 사실 웬만큼 빤한 시이다. 진은영 시인은 1시집에 이어 2시집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 듯한 눈길로 읽어내고, 알 듯한 손길로 써내고 있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최승자를 의식한 자서(시인의 말)와 그러한 자의식 정도일 것이다. 시인 스스로 최승자를 의식한 모양이고, 또 당시에 주변의 문인들(시인과 평론가들)이 그런 식으로 운운했던 것 같은데, 이 시집뿐만 아니라 여태까지의 진은영 시들은 최승자와 상당히 무관한 양태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연관성 없는 최승자를 끌어들일 이유도 당위도 없다.

이 시집 이후로 진은영은 미적 전위와 정치적 진보가 합치되는 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안타깝게도 자기 폐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를 알게 되었다는 자의식은 시와 시인을 모두 망칠 우려가 있다. 물론 대중 영합적인 의미에서 시적 포퓰리즘의 물결 하나쯤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그 자체가 나쁘다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대와 환대의 목소리를 내세워도 자기연민과 자아도취로 퇴행한 나르시시즘적 서정을 시라고 할 수는 없다. 3시집까지는 그래도 기본기라도 유지하려 애썼는데 최근에 나왔던 4시집은 정말이지 슬플 지경이었다.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 당연한 주의주장을 현실정치의 언어 그대로 써놓은 것을 잘쓴 시라고 혹은 좋은 시라고 혹은 새로운 시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잘쓰지도 좋지도 새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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