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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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 <미저리>, <미스트> 등의 원작자다.(이 영화들은 내가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딱 두 권밖에 안 읽었다. 그의 첫 추리소설인 <미스터 메르세데스> 그리고 작법서 <유혹하는 글쓰기>가 그것이다.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더랬다. 어찌나 글을 잘 쓰는지, 싸이코 패스의 심리 묘사를 어찌나 잘하는지. 그리고 그 유머란! 유혹하는 글쓰기는 작법서로써 너무나 유명하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건 이 작법서의 역할이 컸다.

스티븐 킹은 주로 공포, 스릴러, 서스펜스 전문 작가다. 그런 그가 이번엔 전에 없던 상냥함을 보여 주었단다. 그 상냥함을 <고도에서> 어떻게 보여 주었는지 무척 기대하며 읽었다. 소설로 말하자면 그의 작품을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은 게 전부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가 쓴 다른 작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책의 중반부를 접어 들어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 했다. 사람을 하나도 안 죽여서 작가 본인도 어색한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다 4장(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터키 트롯’에 접어 들고부터 이래야 스티븐 킹이지 하며 집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음... 그래서 작가가 하려는 말이 콕 집어서 무엇일까? 명쾌한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한달에 한 권 씩 밀란 쿤데라의 책들을 읽은 후유증인가? (밀란쿤데라의 책은 늘 작가의 의도를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다시 읽었다. 아... 그런데 두 번 읽고 나니 더 헷갈린다. 어쨋든 내 나름대로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본 결과 몇몇 이야기 할 거리가 생겼다.

주인공 스콧은 희귀(?)한 병에 걸렸다. 이것을 병이라고 칭해도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병의 증상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체중을 재나, 그냥 맨 몸으로 체중을 재나 체중의 변화가 없다. 신기하게도 그의 겉모습은 변화가 없지만 몸무게가 서서히 줄어든다. 근육의 양은 줄어들지 않는다. 몸이 가벼워지는데 근육양이 줄어 들지 않으니 아주 작은 힘으로도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다. 그의 몸무게가 14kg이하로 줄면서 그는 우주인처럼 지내게 된다. 즉, 그에게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스콧에게 어떻게 그러한 병이 걸렸는지는 끝까지 아무 설명이 없다. 그렇게 쏙 빠져버린 개연성이 조금 아쉬웠다.

더 미스터리한 사실은 스콧의 몸이 물리적으로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는 따로 있었다. 그가 옷을 입거나 물건을 들거나하면 중량이 더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p.79

스콧에게는 레즈비언 부부 이웃이 있다. 그녀들과는 개 문제로 사이가 약간 틀어졌다. 체중이 0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인 스콧은 죽기 전에 이 틀어진 관계를 바로 잡으려 한다. 그리하야 레즈비언 디어드리도 출전하는 ‘터키 트롯’(자그마치 12km를 달리는 마라톤)이라는 마라톤에 출전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기를 건다.

“만약 당신이 오늘 경기엣 이기면 앞으로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중략) 만약, 반대로, 내가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당신은 미시와 같이 우리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해야 해요.”

“이 일을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거죠? 제가…… 우리가 당신네 남성성을 위협하기라도 하나요?”

‘아뇨. 이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내년에 죽기 때문이에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죽기 전에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잡고 싶으니까.’ (중략)

“그냥 중요하니까요.”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을 바로 잡고 싶어 하나 보다. 실제로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어떤 비밀을 밝히고,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그렇게 고백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러한 일들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는 잘 못한다. 나중에 바로 잡기에는 너무 늦는 일들이 있다.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일들. 그걸 지금 하라고 스티븐 킹이 나에게 이야기 하는 듯했다.

스콧은 희귀한 병의 덕으로 선두로 달리고 있는 디어드리 뒤를 바짝 쫓는다. 디어드리는 놀라서 돌아 보다가 그만 넘어진다. 스콧은 디어드리를 한 손에 번쩍 안아 들고는 몇 미터를 달렸다. 그리고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가 이길 수 있게 뛰라고 소리쳤다. 1위를 한 디어드리를 반기며 미시가 달려 왔고, 그런 그녀와 포옹하다가 둘은 넘어질 뻔 한다. 그때 뒤에서 스콧이 그들을 잡아주려는 찰나에 사진이 찍힌다. 그 사진은 ‘승리의 포옹’이라는 표제로 신문에 실린다. 그 기사로 레즈비언 부부가 운영하던 채식요리 레스토랑은 폐업 위기에서 벗어난다. 사실 스콧이 아니었다면 그 사진은 그저 달리기에서 이긴 동서애자의 사진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디어드리가 말한다. 그리하야 스콧은 죽기 전에 바로 잡고 싶던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잡고 그들의 역경에도 도움의 손길을 주고 가게 되었다.

<고도에서>에서는 이웃들이 레즈비언 부부에게 갖는 선입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심지어 아이들에게 레즈비언은 나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반대로 레즈비언인 디어드리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을 이상하게만 생각할 거라는 선입견으로 늘 날이 서있다. 그로 인해 스콧과의 관계도 틀어진거고.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당신을 대한 태도는 사과해야겠어요. (중략)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저한테 어떤……사고방식들이 있는데…… 그걸 바꾸기가 쉽지 않아서요.”

내 자신이 어떤 합리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그 사고방식은 이제 더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거다. 디어드리는 스콧 덕에 자신의 사고방식이 어떻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스콧이 처음 자신의 증상을 고백한 건 퇴직 의사 엘리스다. 그는 처음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권했지만 스콧이 싫다고 하자 그 말을 존중한다. 나중에 레즈비언 부부 디어드리와 미시에게도 고백했고 그녀들 또한 스콧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들은 스콧의 뜻대로 그를 보내준다. 이것이 바로 존엄한 죽음일까? 0kg이 된 스콧은 점점 하늘로 올라간다. 표지에서 보이던 그림자가 바로 스콧의 그림자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만약 내가 스콧처럼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면 어떨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해 보일 것이다. 레즈비언이든 채식주의자든, 늙었든 젊었든 다 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스콧은 하늘에서 불꽃을 터트린다. 그렇게 그는 밝은 빛을 남기고 계속해서 고도를 높여 올라갔다.

사람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 흙이 되는 게 통상적인 생각이다. 스티븐 킹은 그 반대로 표현했다. 당연한 중력이 사라지고 하늘로 솟아오르며 생을 마감하는 것. 그것은 영화 <미스트>에서 영웅적인 사람보다 일반인이 살아 남는 것처럼 틀을 깨는 생각의 전환이다.

<고도에서> 주인공 이름이 스콧 캐리인데 캐리는 그의 첫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본문에 자신의 작품들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인용한다. 1947년생인 스티븐킹이 다음 작품을 또 내 놓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이러한 작품도 꼭 써보고 싶었기 때문에 쓰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자신의 삶을 정리하듯이 자신의 작품들을 인용한 건 아닌가 싶다. 그러고선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건 아닐까.

이보게들. 고도에서 내려 보라고. 우린 모두 이 둥근 지구에 살고 있는 다 같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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