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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일본소설 : 야행
일본 소설을 즐겨 읽던 사람이라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독특한 연애판타지 소설로 나오키상 후보에도 오른 전적이 있는 소설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작가인 모리미 도미히코는 그 후 10년 만에 신작을 발표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소설 '야행'이다.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밀실'에 갇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 p. 72
구라마 진화제를 구경하러 간 날 밤 하세가와 씨가 사라진다. 영어 회화를 같이 배우던 동료들은 그 뒤 10년 만에 같은 축제에서 모인다. 그리고 그 중 오하시는 10년 전 사라진 하세가와 씨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하고 쫓다가 기시다 미치오 작가의 동판화를 전시하는 화랑에서 '야행'이라는 동판화들을 발견한다.
"저 풍경 속에 서 있고 싶다." 저는 설경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통과하지만 언젠가는." "내 경험에 비춰 말씀드리자면 그런 소원은 대개 다 이뤄져요." 고지마 군이 말했습니다. "저런 역에서 내릴 일이 있을까, 차창 밖으로 본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마음을 스칠 때는 반드시 언젠가 거기로 가게 돼요. 이런 곳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하더라도 말이죠. 참 신기한 일이에요. 마치 운명에 이끌리는 것처럼." - p. 127
야행은 야행열차의 야행이기도, 또 백귀야행의 야행이기도 하다. 함께 축제에 온 동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각자 '야행' 동판화와 관련한 기이한 경험이 있음을 알게 되고,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야행'의 모든 작품에는 묘하게 얼굴이 없는 여자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모험담에도 또한 이 얼굴 없는 여자가 함께 나온다.
사실 기시다 미치오 씨에게는 「야행」과 대칭을 이루는 「서광」이라는 비밀스러운 연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야행」이 영원한 밤을 그린 작품이라면 「서광」은 딱 한번뿐인 아침을 그린 작품이라고 기시다 미치오 씨는 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 기시다 미치오는 그 「서광」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 p. 168
내가 아는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사람이 맞을까? 각각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은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혹은 잃어버린 과거 기억 속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하며 그 동판화 '야행'시리즈에 갇히거나, 갇혀있음을 깨닫는 등 기묘한 체험담들이다. 그 체험담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실체에 가까워지는 '기시다 미치오'.
밤은 어디로든 통해요. - p. 217
세계는 언제나 밤이었어. - p. 218
문득 나를 감싸고 있는 어둠이 광대하게 느껴졌다. "세계는 언제나 밤이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p. 220
교토의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야행이라는 수수께끼의 연작을 발표한 화가 기시다 미치오. 그는 3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교토의 야나기 화랑. 그 곳에서 주관해 연작인 '야행'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개인전이 도쿄에서 처음 열렸다. 해가 뜨기 전에 잠들고 해가 진 뒤 일어나는 연속되는 밤의 세계에 살던 '기시다 미치오'. 연작인 '야행'은 모두 마흔여덟 작품인데, 모두 여행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사실 기시다 미치오는 어디에도 간 적이 없다. 그는 여행을 가지 않았다.
멀리에서 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득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한밤중의 세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덮쳐왔던 것입니다. 그렇게나 밤이 깊고 광대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내가 밤을 헤메고 있을 때 아무리 먼 도시라 해도 같은 밤의 어둠에 싸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꿈을 꾸고 있다. 이 영원의 밤이야말로 세계의 진짜 모습이지 않을까. 그때 「야행」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 p. 262
이야기는 '서광'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그의 유작 중 '서광'이라는 작품은 없었다. 그리고 오하시는 '야행'과 '서광'을 오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서광'이 시작된 밤이기도 했고, 또 '야행'이 시작된 밤이기도 한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모험담들로 시작해 결국에는 기시다 미치오와 10년 전에 사라진 하세가와에게도 닿게 되던 기묘한 밤.
거기에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차창 같았다. 야행 열차 같았다. 설령 창밖에는 어두운 밤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해도 열차 안에는 여행의 동료가 있고, 따뜻한 빛이 있다. 이렇게 긴 밤의 밑바닥을 달리면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 p. 269
같은 아침은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뿐인 아침. 그렇기에 '야행'과 '서광'은 맞닿아 있었다. 실제 지명들이 등장하고 현실과 환상을 계속해서 넘나드는 작품 '야행'. 기묘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음에도 정작 화자들은 오싹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담담해하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름답고 괴이한 밤의 모험'이라는 수식어가 딱 알맞게 느껴지는 '야행'. 여름 밤에 읽을 소설로 꼭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