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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조건은 세 가지였다. 72시간 안에 이름 하나를 말해야 한다. 거절하면, 제안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받아들이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선택을 번복할 수도 없다. 그녀는 이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만난 적 없고,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이 남자를. 그녀에게 빚을 지고 말았다는, 이 강하고 위험한 남자를. 오로지 단 한 번의 거래, 평생 한 번뿐일 제안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거래.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 거의 확실한 거래. 악마와의 거래였다. - p.11
저는 보통 책을 펼치면 단숨에 읽어내리는 타입이예요. 얼마나 두껍든 그건 변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책을 펴기 전엔 충분한 여유시간을 가지고 시작해요. 그런데 T.M.로건 신작소설 29초는 읽으면서 마음 속에 너무나 분노가 많이 치밀어서 덮고 한 숨 쉬고, 다시 읽다가 또 한참을 멀리하고.. 재미가 없어서? 노노. 너무 몰입됐기 때문이예요. 정~말정말 괴로운 고구마구간이 있거든요. 하지만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통쾌한 리벤지 스릴러라는 띠지의 문구만 믿고 정주행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지 꽤 오래 걸려 완독해낸 소설이예요.
규칙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그와 단둘이 있지 말 것. 그를 부추길 수 있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말 것. 택시나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지 말 것. 연구실 밖, 특히 호텔이나 학회장에서 그를 상대할 때는 각별히 주의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어느 때고, 어겨서는 안 될 제1 규칙. 그가 술을 마셨을 때는 위의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 그는 맨정신일 때도 상태가 안 좋지만 술에 취하면 더욱, 훨씬 더 악질이 되었다. 오늘 밤, 그가 술에 취했다. - p. 14
T.M.로건의 29초에는 아주아주 거지같은 인간이 나옵니다. 이름은 앨런 러브록. 저명한 교수죠. 겉핥기식으로 그를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기도 하고,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일부러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쓰레기예요. 권력형 성범죄자죠. 자신의 권위와 평판을 이용해 수 명, 혹은 수십 명. 어쩌면 그 이상의 약자들에게 생계를 위협하며 그걸 빌미로 희롱하고 폭행합니다. 아 다시 생각해도 너무 치가 떨리네요. 서사적으로 당연히도 주인공은 피해자 구도에 있는 인물인데요. 대학 시간강사 세라가 바로 그 인물이 되겠습니다. 전임강사를 원하고 충분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만 러브록과 함께 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이없는 승진탈락의 고배를 마시는거죠.
내게 이름 하나를 주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을. 내가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지. 당신을 위해서. - p. 135
최대한 간략하게 썼지만 그 놈의 행태는 정말 책 29초를 덮었다 펼쳤다 여러 번 하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고 저열하고 비겁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등등등 여러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과언이 아닌데요. 성희롱 수준도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고, 결국 승진도 하지 못하게 되자 세라는 그야말로 분노에 휩싸입니다. 이 때 새로운 전환점이 등장하는거죠. 만약, 누군가 한 사람의 이름만 말했을 때 그 사람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준다는 제안을 한다면...? 누구에게나 이런 경우 말하고 싶은 이름이 하나쯤은 있다. 그렇지 않은가? (p.150)
세라는 그 작은 휴대폰을 두 손에 담아보았다. 100그램도 채 되지 않지만, 바위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생과 사를 가를 힘의 무게. 세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힘. - p. 219
그 뒤에는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는데요. 첫 번째 반전은 정말 책을 한 번 더 덮을 정도로 열받게 했지만... 여기서 하차하시면 안 돼요! 심호흡하고 마지막까지 본다면 통쾌한 리벤지스릴러를 경험할 수 있을거예요!! 달아나지도, 제도의 힘을 믿지도 않는 세라가 맞서 싸우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답답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권력형 성범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본다면 더더욱요. 하지만 현실에서도 해결책을 찾기 힘든 범죄다보니 T.M로건의 29초를 끝까지 본다면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을거예요. 더불어 독자에게 이런 악마의 기회가 온다면 나는 과연 그 스위치를 누를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들어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