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걷는사람 희곡집 3
오세혁 지음 / 걷는사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개한 보도지침은 보도지침 때문에 보도가 되고 있지 않아요. - p. 7 보도지침


공연을 참 많이 보러 다니고 책을 꽤 많이 읽는데도 불구하고 대본집, 희곡집은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이번 년도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의 대사량과 작품 자체에 반해 대본집을 구입한 것이 첫 번째였는데요. 이를 시작으로 공연을 만드는 토대가 되는 희곡 부문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읽어보게 된 걷는사람 희곡집 3. 최치언과 태기수에 이어 세 번째 시리즈인 오세혁 희곡집입니다. 연출과 각색으로도 참 유명한 분이죠. 저도 연극으로는 보도지침, 지상 최후의 농담, 괴벨스극장, 라빠르트망, 블라인드, 뮤지컬로는 밀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설의 리틀 농구단, 홀연했던 사나이 등 다양한 작품을 관람했는데요. 제가 관람한 작품 중 3개의 작품이 이 걷는사람 희곡집 3에 수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외에 2가지 작품인 전선의 고향, 분장실 청소도 실려있었구요.

 

독백은 혼잣말이 아니야. 말을 전하고 싶은 대상이 있어야 해. 이 말을 누구에게 전하고 싶어? -p. 32


희곡집은 이렇게 간결한 지시문과 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직접 공연을 보고 나서 읽은거라 그런지 장면들을 생생하게 다시 복기하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걷는사람 희곡집 3에 수록된 오세혁의 보도지침, 지상 최후의 농담, 괴벨스 극장, 전선의 고향, 분장실 청소 중 텍스트적으로도, 직접 본 공연으로도 가장 마음에 든 건 역시 보도지침이었는데요. 연극은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연극이 위대한 이유는 독백이 있기 때문이야 등 정말 와닿는 대사도 많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예요. 실제 보도지침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와닿는 게 다르더라구요. 자주 올라오는 극이니 못 본 분들이 있으면 한번 쯤 꼭 보셨으면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명심해라. 기억해라. 그리고 절대 잊지 마라. 사람들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두 번째는 의심하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면 결국 믿게 된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려면 국가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에 반대 의견들을 억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진실은 거짓의 원수다. 그러므로 진실은 국가의 가장 큰 적이다. 국민들이 국가가 원하는 이념에 빠져들게 하려면 그렇게 하면 대중들은 방관자가 되거나 어리석어 결국은 국가의 이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pp. 164-165 괴벨스극장


2017년 서울연극제 작품으로 만나봤던 지상 최후의 농담도 읽는 동안 다시 기억이 나더군요. 여태껏 봐온 작품이 많아 여러 번 본 극이 아니면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작품이 희곡을 읽으며 서서히 떠오르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또 거의 대사의 연속이고 지시문은 많지 않은데 배우들이 이런 텍스트를 보고 그런 무대를 만들다니, 하고 연출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네요. 이 작품은 포로로 잡혀 10분에 한 명씩 처형되는 인물들이 총살당하기 전 처절하게 생애 마지막 농담을 건네는 이야기예요. 웃으라고 얘기를 던지지만 처절하죠. 그리고 2016년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꼽혔던 연극 괴벨스 극장. 괴벨스의 어린시절, 문학과 예술의 탄압, 선동, 유대인 학살이 풍자되는 이 극도 텍스트로 보니 신선하네요. 놓쳤던 대사들을 복기할 수 있다는 것이 공연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작품을 보는 순서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나를 아무리 놀리고 비웃고 욕해도 소용없어요. 난 절대 그렇게 안 살아요. 난 그냥 이렇게 살 거예요. 극장을 찾아서 연극을 할 거예요. 극장에서 쫓겨나면 다른 극장을 찾아갈 거예요. 극장이 사라지면 카페에서 공원에서 놀이터에서 연극을 할 거예요. 내가 사는 동안 세상은 점점 꽉 차고 꽉 차고 꽉 차서 나를 밀고, 밀고, 또 밀어붙이겠지만, 난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린 곳에서 계속 연극을 할 거예요. 난 절대로 복수 안 해요. 난 절대로 저항 안 해요. 난 계속 밀리고 쫓기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계속 연극을 할 거예요. 난 이렇게 살 거예요. 난 이렇게 살 거예요. 난 이렇게 살 거예요. - p. 229 분장실 청소


다른 두 작품은 공연으로 접해보지 않아 텍스트로 처음 접해봤는데요. 제가 이 오세혁 희곡집을 읽기 전에 읽어본 대본집도 공연을 보고 구입한 작품이니 온전히 희곡으로만 본 작품은 전선의 고향과 분장실 청소까지 이 두 가지가 유일하네요. 전투상황에 따라 영웅이냐 반동이냐로 갈려 반동이 되지 않기 위해 충격적인 죽음을 불사하며 눈 감은자들과 그들을 포장하기 위한 수습에 관한 전선의 고향, 철거 직전의 분장실에서 철거하러 온 용역과 배우의 대화를 담고 있는 분장실 청소. 두 작품 다 흥미로웠고, 특히 세상의 진짜와 가짜, 연극계의 현실을 얼핏 보여주는 분장실 청소가 인상적이었네요. 희곡을 읽으니 이 작품을 공연으로 만들게 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네요. 걷는사람 희곡집 3으로 만난 오세혁의 다섯 작품들. 이 외에도 오세혁 첫 희곡집으로는 홀연사가 수록된 레드 채플린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 작품과 걷는사람에서 나온 다른 희곡집들도 기회되면 읽어봐야겠어요. 공연을 보고 다시 그 공연을 추억하고 싶거나 희곡에 관심이 있다면 걷는사람 희곡집 3이자 두 번째 오세혁 희곡집인 보도지침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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