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배울 게 많은 사람을 찾아 봐.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운이 좋은 거야.
가까이 그런 친구가 있다면 굉장히 운이 좋은 거야.
배울게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야.
배울게 많은 친구가 훌륭한 친구야.

어른이 되면 아무것도 안 배워도 될까?
그렇지 않아.
세상이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거든.
새로운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지식들, 새로운 기술들이 생겨.
배우는 것은 끝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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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관하여

오늘날 양심은 곤경에 처한 듯 보인다. 많은 ‘양심 자전거‘가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듯이 양심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잘 단련된 사람들은 ‘믿는 것은 좋지만 감시가 더 낫다‘는 견해를 밝힌다. 

양심에 제기될 수 있는 혐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의성이고, 다른 하나는 위장된 사회권력의 성격이다. 
양심은 판단하는 개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양심에 의거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양심이라고 여길 가능성에 노출된다. 
사실 생각해보라. 양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양심이란 것은 결국 개인에게 저장된 규범적 판단들의 어떤 집합이 아닌가? 만일 그 집합의 설정이 개인의 권한에 달려 있다면, 양심의 자의성은 불가피해 보인다.
양심이 자의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들이 기대하는 규범이 내재화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정말 그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내재화된 규범을 ‘불러내는‘ 것이다. 
양심은 권력이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의 내부에 장착시킨 규범 칩chip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양심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를 제대로 개념화한 것일까? 
나는 부분적으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심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는 ‘자유‘와 ‘규칙‘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자유는 분명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의 본령이 자의성에 있다고 여기며, 자의는 자유와 가장 먼 것이라는 고상한 자유의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다르다. 사회적 삶이라는 조건하에서 애초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의미한 자유는 사회적 삶의 조건하에서의 자유이다. 그래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는 ‘규칙‘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타인들과의 삶은 (거의) 언제나 규칙들에 따라 조정되기 때문이다.

규칙 밖에서 살 수 없다면, 사회적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따르는 규칙이 ‘나에게 제정의 권한이 주어졌더라도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규칙‘일 때다. 양심을 이런 ‘자유의식‘과 연관시키면 양심은 위에서 언급한 자의성이나 내재화된 권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규칙에 따른다면어떻게 판단하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규칙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반성적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수취인을 잘못 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양심에 비추어 판단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성적 일관성reflectiveconsistency‘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신이 양심적인 존재임을 통용되는 규칙에 언제나 합치하는 식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규칙을 어길 때는 충분한 근거 위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장기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양심은 자연적 현상도, 초자연적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반성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삶의 한 양식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양심과 관련된 우리들의 경험 하나를 조금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경우 우리는 두고두고 괴롭다. 꿈에서조차 괴롭다. 왜 그런가? 만약 양심이 내재화된 사회적 권력일 따름이라면, 나는 양심에서 멀어질수록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양심의 고통은 나의 사고에 각인된 권력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자신이 자유롭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는 의식과 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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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긍정적 역할기대에 맞는 행위 양식을 말한다. 긍정적 역할기대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 몸이 스치는것조차 싫어하는 것은 애인으로서의 예의가 아니지만,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자꾸 가까이 다가서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다. 

예의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대에 대해서 서로가 자유롭게 동의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다. 

반면 예의가 족쇄일 때도 있다. 그것은 나에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역할기대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를 요구할 때다. 
신분지배의 사회에서 하층계급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고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혁신의 시작이었다. 
어법과 인사 방식, 복장을 의도적으로 달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패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의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예의를 전부 다 버리

려는 것은 잘못이다. 

예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만 예의를 지키지않아도 사람들은 곧 경찰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누군가 밤새 산책로에 똥을 싸놓았다. 분개했지만 치우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산책길을 기피한다면 똥을 싼 사람에 의•해 최대의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치웠으면 그 사람이 두고두고 미웠을 텐데, 치우고 나니 그렇게 밉지 않았다. 다음에 안 그러기를 바랄 뿐. 너무 급해서 그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귀갓길에 토해놓은 흔적을 보고 혹시 누군가가 거기서 더러운 오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청년기의 방황과 고뇌를 읽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또 부끄러웠을까.

예의를 갖추고 타인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며 기다려주는 것은, 종종 상대의 정말 불쾌한 행위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응이 된다.


신념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신념은 내 마음대로 어찌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각이란 선전이요, 전략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신념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이 나의 주인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어떤 다•른 편익과도 바꿀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순교가 아마 신념의 가장 순수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수세적 신념과 달리 공세적인 신념은 의심해 볼 만하다. 

공세적인 신념은 그 뒤에 신념 외의 다른 이익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큰소리로 외쳐댈수록 근거 없음을 은폐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공세적 신념은 많은 경우 신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니 신념은 갖기도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다. 지적인 부담을 담당해야 하고 신념이 요구하는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신념은 우리에게 확고한 기반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찰과 고독, 희생을 감내하라고 요구

한다. 
그러나 설명과 증명을 위한 지적인 부담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가 있는 신념을 갖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장 존중할 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신념을 말하는 자를 경계하라!


따지고 보면 관용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어떤 제재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의미에서 강자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해를 입을까 봐 상대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회피나 타협이다.

 ‘착한 내가 참지‘라는 농담은 현실에 만연한 회피와 타협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강자야말로 약자에 대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제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바로 관용의 어려움이 있다. 

혹시 누군가는 "나를 일단 강자의 위치에 올려다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관용적인지 보여주지"
라고 냉소적으로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자신이 입힌 피해보다는 자신이 입었거나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행사하고, 행사할 수 있는 억압과 구속은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강자의 힘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경우,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

심지만 모두 강자다. 세상에서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대등한 시민 사이는 물론이고,
어 어린 자식도 부모가 정서적으로 자신에게의존적이라는점을 이용해서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학생과 선생의관계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성적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이 있기때문에 학생의 눈에는 강자로 보인다. 그러나 스포츠 클럽에•서라면 선생은 젊은 제자가 부럽기만 할 것이다. 아무튼 누구•에게나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가 보통의 위치에서 관용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면, 그가 더 강자의 위치에 올라섰을 때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관용은 강자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윤리인 것이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내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사태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관용은 바로 관용이 필요한 곳에 충분하게 있기 어렵다. 마치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에서의 화폐처럼 말이다. 

관용은 상대에게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스스로 삼갈 때만 성립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가. 
바로 관용이 필요하고 또 있어야 할 곳에 관용이 자리 잡기 어렵다는 사실, 이 ‘관용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까? 

강자의 자기절제에 호소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다. 그래서 강자가 행사하는 자의적 폭력에 맞서는 제재 수단을 강구하는

stewing

나는 근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사회비판의 유형들이, 번영의또래인 빈곤 위험을 유지시키는 굴종, 풍요의 기반인 무책임문제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 일부(부르조식 제급)의 번영이 얼마나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그등의 고난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한 사람들은 노동자의 해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남성들이 위엄과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사회가 얼마나 여성들의 굴종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남성만큼 선택적이 될 때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없다. 그들은 여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얼마나 자연에 대한 무책임한 남획(종 다양성 감소, 부존자원 고갈, 오염증가 등)에 의존하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태주의

•자 또는 최소한 환경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 일부의 번영 독점, 남성의 특권적 위치, 산업사회의 무책임성을 문제삼는 의식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비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고난과 굴종의 위치에 선자, 자연의 훼손에 의해 삶의 존립 기반을 빼앗긴 자는 자신의 위치에 의해 비판적 잠재력을 형성한다. 때로 그들•은 답답하리만치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상황을 문제삼기 시작할 때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비판적 이론가란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는 빈곤과 굴종에 선 자들과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또는 자연을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야 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를 정상화하거나 최종화하려는 입장들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판적 사유란 세계에 비판적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있는‘ 비판적 거리에 자신을 접속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론가의 과제는 저거리를 정당화의 물음에 연결시켜, 그 거리를 해소하는 것이다.

타인의 복지를 향상시키며 자연의 남획을 방지할 수 있다면, 자신의 풍요와 특권적 위치를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제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비판적 사유자가 될 수있다. 비판적 이론가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기업 내에서 해고 문제를 다루는 협의체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해고된 사람들을 재취업 훈련과 복지를 통해서 흡수해야 한다. 

물론 그런 재원은기업과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조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그리고 현재로서는 최적의) 해법이다. 무척 중요한 진화적 성취다.

이제 묻는다. 

기업은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가? 오히려 주로 방해를 해오지 않았는가? ‘
해고할 수 있는국가를 만들려고만 했지 ‘해고해도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는 안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업은 해고의 자유를 말할자격이 없다. 
국가더러 농성을 해산시켜달라고 하는 것은 협•잡꾼이 되라는 것이다. 

보험을 들지 않은 사람은 사고처리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듯이, 복지국가 형성을 막아온 기업도 해고 후유증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주주들에게 거액의 배당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니, 
노동자들이 해고를 감수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고공농성을 슬픈 마음으로 지지한다. 
그런 농성을 사라지게 하는 농성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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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토론문화가 낯선 까닭은

각종 차별, 권위주의, 문화적 획일성, 도덕적 능력 부족......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토론문화가 약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토론은 그저 사람들이•모여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다.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횟수로 보자면 우리가 남보다 뒤질 것이 없다. 우리는 오히려약간의 고독이 사치가 될 정도로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있지 않은가. 토론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매우충족시키기 어려운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 전제들을 이해해야, 토론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공들이고 노력해야만 향상될 수 있음을 납득하게 된다.
이상적인 토론이라면 ①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논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②참여자의 모든 의견이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하며 ③논의과정에서 의견의 설득력 외

에는 어떤 힘이나 권위도 작용해서는 안 되고 ④ 토론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구속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반대로 합의가되지 않았다면 의견 차이가 존중되어야 한다.

①과 ②는 참여와 개방성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론은 원칙적으로 이해 당사자가 모두 참여하여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
아무리 토론에서 만장일치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이해 당사자의 일부가 참여에서 배제되었다면, 또 모두가 참여하였더라도 일부의 목소리가 억눌렸다면 그 합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③은 논증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이 조건은•토론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잘 보여준다. 제대로 된 토론이라면 논의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의견의 설득력 외에 어떤 권위나 힘도 작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쉬운 일인가? 의견의 설득력이란얼마나 자주 물리적 힘, 문화적 권력, 사회적 지위, 성 역할 구별, 연령 차이에 의해 채색되어 버리는가. 또 상황이 긴박할수록 토론의 여지가 줄어든다. 당장 눈앞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또는 오직 생존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면 한가하게 토론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문화적 획일성도 토론이 자리 잡지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이미 뻔히 알려진 경우 우리는 토론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차별, 긴박성, 문화적 획일성은 토론문화의 뿌

리가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④는 도덕성과 제도의 조건이다. 합의 당사자들은 토론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준수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자신의 이익을 조금 침해한다고 해서 합의사항을 성실하게이행하지 않는다면 서로에 대한 신뢰는 금세 깨어지고 토론의 의미가 퇴색한다. 상대가 합의된 사항을 준수할 것이라는기대를 할 수 없다면 누가 진지하게 토론에 임할 것인가. 그런데 이 조건 역시 그렇게 쉽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의 이후에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치면, 합의사항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나에게 당장 더 큰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면, 합의를 지키려는 우리의 의지는 쉽게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론문화를 위해서는 웬만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합의사항을 준수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지, 그리고 실제로그런 의지를 관철시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합의사항의 준수를 서로의 도덕적 의지에만 맡겨두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특히 내용이 아주 중대하거나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합의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들은 합의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을 때 우리는 설령 상대가 합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줄어든 경우에도 합의사항과 달리 행위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장 과정에서 합의사항을 준수하려는 도덕적 태도와 용기를 배우는 대신 임기응변을 지혜인 것처럼 배우고, 사회의 제도적 장치가 공정성에 따라서

즐거움 되찾기

철학이 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이무엇일까? 나는 어떤 즐거움, 아주 고급스러운 즐거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많은것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남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처럼 철학에 대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성철 스님이 준 감동의 정체도 그런 즐거움에있는 것 아니었을까? 그가 고행 끝에 이지러진 얼굴을 보였다면 모두가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을까?
믿기지 않는 고행을 하고도 해맑게 웃는 표정 때문에 세속의삶들이 그 앞에서 자신의 누추함을 돌아보았던 게 아닐까?

외치고, 비판하고, 투쟁하더라도 바탕에는 즐거움을 느낄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인문학자들이 위기를 얘기하는데, 도와달라고 아우성치기보다 우리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라고 할 자신이 있다면, 인문학의 아우라가 훨씬 커질것 같다. 도와달라고 외치는 녀석은 아무래도 성가실 따름인

데,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친구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는 표정 관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실실 웃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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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철학, 삶에 날개를 달다

살아가며 만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에 관하여

조심하자. 무엇은 화낼 만하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당신의 판단에 성숙의 정도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드러난다.

작은 물음이 작은 답을 얻게 하고
큰 물음이 큰 답을 얻게 한다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이었던가.
아마 사소한 일에 대한 분노가 작은 인품을 만들고
큰일에 대한 분노가 큰 인품을 만든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나는 당신이 작은 편익과 사소한 자존심 싸움에는 넉넉한 마음이기를 희망한다.

그렇지만 권위주의와 사회적 차별, 세계의 기아,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 여성의 좌절, 맹목적인 자연의 파괴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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