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쥐를 생체실험한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긴장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또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 실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냐고 물었더니심장과 간, 콩팥 같은 것이 흰쥐의 몸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흰쥐가 불쌍하다고 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후에 이 아이들에게 흰쥐 생체실험을 시킨 어머니를 만났다.
왜 그런 실험을 시켰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과학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다른 아이들도 다 하니까, 그런 것을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또 토끼를 생체실험한 후에 몹시 괴로워하는 한 고등학생을만난 적이 있었다. 과학 동아리에서 행해진 실험이었는데, 그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는 토끼를 마취시키고 해부하는 친구들이 무서웠다고 했다.
나도 고등학교 때 토끼를 해부한 경험이 있다. 마취한 토끼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목에 올가미를 씌워 죽인 토끼였다. 마을 어른들은 그 토끼를 다리 밑으로 끌고 가서 나한테 해부하라고 했다. 털을 없애고, 배를 가르고, 간과 콩팥이며 쓸개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찾아가도록 훈수하였다. 그분들은 나에게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그런 일을 시킨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해 그런 일을 시킨 것이었다. 비록 인간이 잡아먹을 수밖에 없지만, 간이며 쓸개, 창자 등 인간과 모든 걸 똑같이 갖춘 동등한 생명체라고 하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이런 글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모른다.
나는 서울에서 ‘우리 가게에서는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만판매합니다!‘ 하고 용감하게(?) 써붙인 글을 보았다. 나는 한동안 그 가게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놀랍게도 그 가게는 손님이아주 많았다.
하루에도 애완동물의 목줄을 끌고 다니는 사람을 수십 혹은수백 명씩 마주친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에게 애완동물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만약 그 애완동물들이 실험실로 끌려간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애완동물과 야생동물은 다른가요?‘, ‘우리가 먹는 삼겹살이나 치킨과는 어떻게 다른가요?‘라고.
나는 강연을 듣는 아이들에게 종종 "너희들은 참 불행해."라는 말을 한다. 그때마다 그들은 약간 놀란 듯하다가 이내 체념하는 눈빛을 지으면서 내 말을 자기들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래, 우리 세대는 불행하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하기

쉽지 않고, 점점 많아지는 노인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하고......"
내가 히죽히죽 웃다가 "왜냐고? 너희들은 너무 오래 살아야 하니까!"라고 말하면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리다가 이내 서글픈 웃음을 짓는다. 맞다. 지금 아이들은 불행하다.
인간이 자랑하는 엄청난 과학과 숱한 의학 지식이 수명을 끝없이 연장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백 년, 삼백 년 산다면 너희 그많은 시간을 뭐 하고 살래? 시간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거든." 내 말에 아이들은 그냥 멍하니 나를 쳐다만 보고 있다.
나는 가끔씩, 지금 내가 행복한가, 하고 묻는다.
나는 가끔씩 청소년이었던 과거 속의 나에게 넌 행복했니?
묻고 싶어진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인간들을 많이 만났다. 책을 통해서 혹은 꿈을 통해서 과거 속의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인간들은 잘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했다. 오래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들의 소득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평균수명도 거의 배 이상 늘어났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복 지수도 그만큼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그렇고. 미국이 그렇고, 일본과 한국이 그렇다. 그런데 그들은

더욱 더 맹렬하게 잘 살고 싶어 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만약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그러니까 신이 된다면 그때는 행복해할까? 이 글은 그러한 물음표들의 메아리다.
나는 한 지인이 보내온 카톡을 몇 번이나 곱씹는다. "코로나19를 일으킨 바이러스의 등장은 근본적으로 환경을 착취의 대상으로 대하는 인류의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어떠한 언론도 거기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오로지 악의 축인 바이러스의 퇴치만이 정답인 것처럼 떠들어댄다."
나는 앞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일어날까 봐 두렵다.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동물들이 착취의 대상이라는 발상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두려운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다. 공교롭게도 이때에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이 온 나라를 태질하고 있어서 몹시 우울하다. 그래도 날은 풀리고,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있어서, 그것들을 보고 다시금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매화꽃이 피고 버들개지도 부풀어 오르고 
봄눈까지 휘날리는
2020년 3월 어느 날, 이상권

인간의 그늘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을 위해
생태 이야기꾼 이상권이 들려주는 ‘불편한 진실‘

"인간은 결코 특별하지 않아.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지."
가축도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야. 최소한 몸을 맘대로 돌릴 수 있고, 맘대로
털을 고를 수 있고, 맘대로 누웠다가 일어날 수 있고, 맘대로 날개를 펼칠수 있어야지. 지금 너희들이 좋아하는 치킨, 삼겹살, 스테이크가 되는 닭이나 돼지, 소들은 최소한 그런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거든.
지옥이나 다름없지. 그런 곳에서 강제로 살만 찌우도록 한 다음, 인간의 입으로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은 가축들의 지옥을 먹고사는 것이지.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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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여덟 가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이 책에는 모두 여덟 편의 한문 단편을 골라 실었습니다. 사실 한문단편은어른을 위한 읽을거리로 등장하였고,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읽히기에 부적절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장래의 역사를 담당할 훌륭한 인간형 내지 인간 기질을주제로 한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이 읽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매우 사실적인 인물 설정과 이야기 전개는, 앞서 말한 것처럼 18~19세기 무렵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전해 주어 흥미롭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책을 좀 더 알차게 읽을 수 있도록 한 편 한 편의 개략적인 내용과 배경이 될 사항을 소개합니다.

뺨 맞은 원님

전형적인 한문단편에 속할 이 이야기는 성질이 고약한 원님을 아랫사람들이 짜고서 골탕을 먹이는 이야기입니다. 선정을 베풀어야 할 관리가 자기고

집이나 세우고 일을 잘못된 방향으로 처리해 가면 박 소극적이지만 유쾌한 방법으로 골려 줄 수 있다는 데 재미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수령을 중앙에서 파견한 대신, 거리(胥)들은 그 지역출신이 종신직으로 맡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끼리 짜기만 한다면 아무리지위가 높은 수령이라 할지라도 이런 봉변을 당할 수 있었지요.
물론 서리들의 이 같은 행동에는 나쁜 점도 있습니다. 비록 여기서는 수령의 잘못이 크고, 그래서 아랫사람들이 마을의 안녕을 위해 선한 거짓말을 동원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사례 또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수령과 지방 서리들이 적당히 결탁하게 되지요. 그래서 백성들의 삶만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바보 신랑 성공기

조선 시대 양반은 신분상 특권을 누리고 살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붙어 정상적인 벼슬살이를 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반들의 자식에대한 교육열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었지요.
조선의 사회 · 경제 구조에서는 관리가 되어 벼슬살이를 하는 것 말고 뾰족한 다른 출세 길이 없었습니다. 과거에 붙어 관리가 되려는 경쟁은 오히려 지

금보다 더 치열했다고 할 수 있지요.
대대로 빛나는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래서 대단한 중압감을 지니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사회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보가 되어 버린 그는 한 사회가 가진 문제점의 소설적 표현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공부하는방법이나 사람이 가진 장기는 다 다르다는 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조선 시대판 ‘바보 온달‘이라 할 이 이야기는 원래 제목이 ‘김안국‘인데, 실제로 김안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나,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는 무관합니다.

옛 하인 막동이

양반 제도라는 것이 철통 같은 조직망으로 짜여져 아랫사람의 진입을 막았던 것 같지만, 18~19세기를 넘어가면서 뜻밖의 사태들로 신분 변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였지요.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양반

도 양반 행세를 하기 어렵고, 상놈이라도 돈을 가지고 높은 신분을 살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 이 시기에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었을 때 매우 실감나게 읽힙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고, 그러지못했을 경우 양반이라도 날카로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하지만 주인공 막동이가 보여주는 언행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상하 관계나 윤리 의식을 밑바탕에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돈을벌어 양반이 된 중인 이하 서민들의 인식과 행동의 한계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타고난 신분이 아닌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열려 있는 사회의 가능성을 작게나마 보여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북경 거지

조선 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의 통역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역관이라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역관이 겪은 일을 소재로 씌어졌지요.
조선은 초기에는 명나라에, 후기에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적인 행사였기에 그 자체로는 기분 나쁜 일이긴 하지요.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불가피한 일이었고, 다른 측면

에서는 그것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인데다 조공을 빌미로 한하나의 무역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사건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하겠습니다. 오천 냥의 은화를 가지고 가서물건을 사와 판다는 것은 당시의 무역 행위 가운데 하나였던 셈입니다.
작은 나라의 역관이지만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데서 나오는 주인공의 행동은 다소 엉뚱한 데가 있지만, 장사에 눈을 뜨면서도 사람을 믿는 도리를 지니고산 새로운 인간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금 가득 은 가득 요술 바가지

한문단편의 묘미가 드러나는 구성에 인물 묘사가 뛰어납니다.
여종이 자기 방을 꾸밀 수 있다거나, 자신의 직관적인 판단으로 남편을 고를 수 있다거나 하는 점들이 자칫 조선 시대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여러분들은 이미 여기 실린 단편들을 통해 시대가 변한모습을 보았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여종에게 선택된 주인공 남자는 ‘바보 온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도타운 정과 기이한 행동을 지닌 특이한 사람으로 그려져 소설적 재미를 한껏더해 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으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

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들을 마음속에 담아 둔다면 좋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요술 항아리를 약속대로 갖다 버리는 장면은 이 이야기가허구임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허욕과 욕심을 버리고 살기를 바라는 이야기꾼의 배려가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엽전 두 꿰미 공덕

이 이야기는 여기서 소개하는 한문 단편 가운데 가장 완벽한 소설적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먼저 시골의 향반들이 중앙의 관직을 얻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나, 지금의송파나 거여동이 서울의 관문으로 누렸던 상업적 열기 따위를 확인할 수 있지요. 다른 한편 주인공이 비록 허황하고 무능하다 해도, 다른 측면에서는 그지없이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고, 끝내 그 같은 자신의 성격대로 살아가다복을 받는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아야겠습니다.
사실 원본에서는 불쌍한 여인이 은혜를 입어 큰돈을 벌었다는 데 초점을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실으면서는 ‘엽전 두 꿰미‘가 어떻게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지게 했는가에 주목하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세딸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지만 자식은 누구도 부모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딸들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딸이니까 그랬다는 자칫 그릇된 인식을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게다가 사촌 남동생은 누이들에게 모함을 당해 집을 나가기까지 했으면서도 끝내 숙부를 잘 모셨다는 것이니, 남자니까 그랬다고 간단히 몰아가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들이 부모를 후원자로만 본다든지, 부모의 능력에 따라 모시거나 모시지 않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든지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바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웃이며 스승과의 만남에서도사람을 대하는 원리와 원칙은 마찬가지라는 점을 일깨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은 항아리

부모나 어른이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진정한 교훈이 무엇인가를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무렵 가장 값어치 나가는 화폐 단위는 은이었습니다. 북경으로 가는 역관들이 은을 가지고 가서 교역 수단으로 삼을 만큼 국제적인 화폐이기도 했

학부모와 선생님을 위한 보충 설명

앞서 말한 것처럼 한문 단편은 기본적으로 어른들의 읽을거리였습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어린이들이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히는 학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그 배경을 잘 이해하시고 도움말을 주면, 옛 선비들의 삶과 철학이 오롯이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몇 가지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적습니다.
먼저 ‘한문단편‘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학자 가운데 한 분인 이우성 선생은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조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형성과 농촌의 변화, 양반 사족의 광범한 몰락과 중인 · 서리 등을 위시한 상인.
수공업자·농민들 사이에서의 신흥 부자들의 대두 등등, 많은 새로운 역사현상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전통적 가치관이 크게 동요되면서 부와 신분의갈등, 남녀간의 본질적 정욕과 기존 규범과의 모순이 중대한 문제로 제기되는 동시에, 그 해결에의 추구가 이 작품들에 의하여 진지하게 그려지고있으며, 또한 장래의 역사를 담당할 훌륭한 인간형 내지 인간 기질이 양반계급에서가 아니고 민중 속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이 작품들은 가장 잘 포

착하였고, 또한 가장 잘 묘사했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설명은 그대로 한문 단편의 특징이면서, 야담을 한문 단편이라는용어로 바꾸어 쓴 학자들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한문단편은 이 같은 분위기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소설의 형식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대체로 짧은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므로 단편(短篇)이라 하지만, 소설이라 붙이기에는 어설픈 대목이 있습니다. 한문 단편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지요. 이들과 달리 소설적 구성을 거의완벽하게 갖춘, 예를 들어 박지원의 「허생전」 「호질」 같은 경우에는 한문 (단편)소설이라 이름 붙입니다. 그러므로 한문 단편을 야담과 한문 소설의 중간쯤이라 해두면 무난할 듯합니다. 야담보다 나아간 점은, 소재나 그것을 다루는 솜씨가 훨씬 더 리얼리티를 띠었다는 점입니다.

이우성 선생과 함께 한문 단편의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임형택 선생은다음과 같이 그 성격을 정리하였습니다.
1. 비록 한문 표현을 쓰고 있지만 고답적이고 난삽한 문투가 아닌 우리 민족 특유의 속담, 생활어휘를 적절히 폭넓게 구사해서 평이하며 우리의 정

감에 밀착되어 있다.
2. 그 시대 인간의 삶의 현실을 구체적 사실적으로 다양하게 반영하였다.
특히 새로운 부의 추구, 신분의 분화, 민중의 저항 등 이조 후기 역사의 발전적 방향을 부각시키고 있다.
3. 역사의 전진적 방향에서 창조적 저항적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인간의 갈등을 포착하여 새로운 인간 형상을 창출하였다. 저항적 창조적인주인공은 주로 민중 속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4. 이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전개 방식은 서술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형성 과정의 특수성(강담사의 이야기가 정착된 것)에서 연유된 현상이다.
우리 문학사를 보면 18세기 이후의 분위기는 이전과 상당히 다른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문 단편들이 우리 특유의 정감에 밀착하여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새로운 인간 형상을 창출한다는 점은 같은 시기의 사설시조의 발전이나 판소리 · 탈춤 등의 성장과 궤를 같이합니다. 전통적인 농업 경제의 기반은 그대로이지만, 견고했던 양반 체제가 흔들리고 왕실과 귀족 그리고 농민사이에 맺어진 전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능력 있는 개인의 재산이 인정되는분위기가 성립되면서, 이른바 돈 버는 일이 사람 사는 모습들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근대적 자본주의의 싹이라고까지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비록 전반적인 사회 현상은 아닐지라도 분명 이전사회와 달라진 모습이고, 어느 정도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문 단편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소재와 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와 소재는 한문 (단편)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나, 한문단편은 더욱 간단하고 재빠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사안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에 훨씬 쉬웠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문학사에서도 "한문 단편은 신분제의 동요, 화폐경제의 발달, 타고난 기질의 긍정 등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현실적 경험에 입각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동일 선생)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한문단편이 실린 책들

이와 같은 한문단편을 실어 전해 주는 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야담집의 경우, 유몽인(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최초의 야담집으로 칩니다. 그는 세상에 전해 오거나 주위에 돌아다니는 이

야기를 찾아 모아서 기록한다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자신이 암행어사로지방을 돌면서 들은 이야기들이 주로 실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봉인의이런 일은 같은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노래나 이야기를 모으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치민(民)의 한 수단으로행해졌던 바입니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것들을 들어 보면 민심을 살필수 있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치민의 수단으로 관에서 수집하던 것이었으므로 그 주제나 내용에서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몽인의 작업은 그 같은 관료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지탄의 대상이 된 이유였겠지요.
앞서 소개한 안석경의 『삽교만록」은 지은이가 강원도 두메산골 삽교라는곳에 들어가 살면서 겪은 바를 정리한 것이고, 「파수록」은 같은 시기 곧 18세기 중엽 지은이 미상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격적인 야담집으로는 19세기에 들어 편찬된 이희평(李羲平, 1772~1839)의 『계서야담(西野談)』을 듭니다. 그는 사대부 출신이기는 하나 당대 민간에서 유행하던 창의성 있는 설화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야담집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청구야담(靑邱野談)』과『동야휘집(東野彙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청구야담」은 19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져 가장 많이 읽힌 책입니다.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상당한 신분에 있는 문필가의 손을 거쳤을 것이 분명한데, "하층민이 겪은 사연을 통한 세태 묘사에서 한층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여섯 권의 책에 260편 가량의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양으로 압도하지만, 앞에 나온 야담집들과 중복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러나 야담집으로서 결정판이라는 평과 함께 이 분야 연구의 가장중요한 자료로 받아들여져 최근에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원명(李源命, 1807~1887)의 『동야휘집』은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사람이라는 편찬자의 이력이 특히 눈에 띕니다. 「어우야담」과 「계서야담」의 저자가 같은 신분이었음을 의식해서인지 두 책에다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보태서 새로운 야담집을 만들려 했고, 편집이 조금 딱딱하다는 점에서 『청구야담과는 구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찬자가 분명하고, 양적으로 『청구야담에 버금가는데다 야사(野史類)의 성격까지 갖추고 있는 점이 특이하여많은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밖에 이 책에 소개한 이야기들이 실린 야담집으로 『차산필담(此山筆談)』과 『동상기찬(東廂記纂)』 그리고 『파수편)』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차산필담』은 호를 차산(山)이라 했던 김

해 출신의 아전 배전(裵)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편이실린 작은 책인데, 창작의식이 두드러진다는 좋은 평과 함께 이율배반적 중인의식의 소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청구야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함은 분명하지요. 『파수편』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편찬자 미상의 필사본인데 그 내용이 『청구야담』과 거의 중복되고,
『동상기찬』은 일제 시대 때 백두용이라는 사람이 엮어 출판한 책입니다.
이상의 야담집에는 책 이름에 야담, 필담 등의 용어가 보일 뿐, 한문 단편이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문 단편은 앞서 소개한 바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이 한문단편은 어떻게 전승되고 있을까요?
먼저 번역의 형태로 소개되는 경우로 『청구야담』 등의 번역 출간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편찬한 책으로는 이가원 선생이 엮은 『이조한문소설선』이 1960년대에 나왔고, 1970년대에 들어 이우성·임형택 선생이엮은 『이조한문단편집이 선을 보였습니다. 특히 후자는 한문 단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키며, 학계에서 이 분야의 연구를 이끈 책입니다. 모두 서른아홉종의 문헌에서 176편의 이야기를 뽑아 세 권으로 나누어 짤막한 해설과 함께번역하고, 원문까지 실어 놓았습니다.

해 출신의 아전 배전(裵)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여섯 편이실린 작은 책인데, 창작의식이 두드러진다는 좋은 평과 함께 이율배반적 중인의식의 소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청구야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함은 분명하지요. 「파수편」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편찬자 미상의 필사본인데 그 내용이 청구야담과 거의 중복되고,
『동상기찬』은 일제 시대 때 백두용이라는 사람이 엮어 출판한 책입니다.
이상의 야담집에는 책 이름에 야담, 필담 등의 용어가 보일 뿐, 한문 단편이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문 단편은 앞서 소개한 바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만들어 낸 용어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이 한문 단편은 어떻게 전승되고 있을까요?
먼저 번역의 형태로 소개되는 경우로 『청구야담」 등의 번역 출간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편찬한 책으로는 이가원 선생이 엮은 『이조한문소설선이 1960년대에 나왔고, 1970년대에 들어 이우성 · 임형택 선생이엮은 『이조한문단편집이 선을 보였습니다. 특히 후자는 한문 단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키며, 학계에서 이 분야의 연구를 이끈 책입니다. 모두 서른아홉종의 문헌에서 176편의 이야기를 뽑아 세 권으로 나누어 짤막한 해설과 함께번역하고, 원문까지 실어 놓았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이가원과 이우성. 임경의 편찬서에 기대어 엮었습니다. 특히 『이조한문단편집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원문과 대조해 가면서부분적으로 고치거나, 독자의 수준에 맞게 표현을 바꾸어 쓰기도 했음을 밝힙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수록된 책

뺨 맞은 원님: 「축관장지인타협(逐官長知印)」 『청구야담』 2권

바보 신랑 성공기: 「김안국(金安國)」 「동상기찬』 2권

옛 하인 막동이 : 「송반궁도우구복(宋班窮途遇舊僕)」『청구야담』 6권,
「구복자철보은정(舊僕刺鐵保恩情)」 『동야휘집』 4권

북경 거지: 제목 없이 실림, 『삽교별집』 4권

금 가득은 가득 요술 바가지: 「택부서혜비식인(擇夫壻慧婢識人」『파수편』上권, 『청구야담」 8권

엽전 두 꿰미 공덕: 「수은식화(受恩殖貨)」 『차산필담』 2권

은혜를 모르는 세 딸 : 제목 없이 실림, 「파수록

은 항아리 : 「굴은옹노과성가(堀銀甕老寡成家)」『청구야담 2권참고한 책이조한문단편집 상·중·하」 이우성· 임형택 엮음, 일조각 1973~78『이조한문소설선」 이기원 엮음, 민중서관 1961『청구야담』 이월영 • 시귀선 옮김, 한국문화사 1995야담문학연구의 현단계 1~3』 정명기 엮음, 보고사 2001한국야담자료집성 1~12 정명기 엮음, 고문헌연구회 1987『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음, 지식산업사 1984『한국문학사의 시각』 임형택 지음, 창작과비평사 1984

"네가 만 냥을 구하는데, 겨우 오천 냥뿐이라 대답을 못하였을 뿐이다.
너도 꽤나 성급하구나. 우리를 조롱하고, 우리나라를 작다고 깔보다니."
기운은 호기스럽게 은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그 주머니에는 서울을 떠나올 때 나라에서 빌린 은 오천 냥이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때서야 북경 거지는 절을 하며 말하였다.
"소인이 말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대인께서 깊이 꾸짖지 않으시고하찮은 거지에게 일을 맡겨 주시는군요. 이제야 비로소 기회를 얻어제 능력을 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통역관들은 기운이 또 정신 나간 짓을 하는구나 하고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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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

저 가을 산을어떻게 혼자 넘나우리 둘이서도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문들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안고. 또 어떤 문들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 이상은안 돼!" 하며, 어떤 문들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 하며 후회속에서 조용히 닫힌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5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스코트가 만 100세가 된 지 3주일 뒤에 메인에 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날 하나의 장이 막을 내렸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이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 않은 채삶을 마쳤다. 나는 느슨하게 그의 손에 마지막까지 쥐어져 있던 고삐를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내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나는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알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새가 슬퍼하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우리 머리에 새 둥지를 틀게 할 필요는 없다‘는 고대 중국의 격언이 생각난다.
나는 스코트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처럼 살려고 애쓸 것이다. 그이는 우리 집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보물창고였다. 그이와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 이제 나 혼자가 되었으니 내 스스로모든 일, 모든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새뮤얼 존슨(S. Johnson)은 1780년에 아내와 사별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민을 담아 다음과 같이썼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아내를 잃고 뒤에 남은 사람은 희망과 걱정, 관심사를같이했던 유일한 존재가 그리고 많은 고락을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함께 돌아보고 앞날을 함께 그려본 유일한 반려자가 떨어져나갔음을봅니다. 삶의 연속성이 상처받고, 감정의 안정이 멈추며, 외부의 자극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까지 삶의 흐름이 중단되고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 중단된 시간은 끔찍합니다."
스코트가 떠난 뒤 몇 달은 내 정신에서 축복받은 공백의 시기였다. 친구들은 내가 규칙을 지키면서 겉으로 보아 명랑하게 모든 일상 활동을해나가려 했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내게서 어떤 거리감과 관심이 옅어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루이스(C. S. Lewis)는 <눈에 보이는 비통함 A Grief Observed》에서이렇게 썼다.
"잃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 뒤따라오기 마련인 한 부분이다.
결혼이 구혼에 뒤따르듯, 가을이 여름 뒤에 오듯 사별은 결혼에 이어서 온다. 잃는다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이며, 춤

의 중단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을 때그 사람 손에 이끌려 우리는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앞에 남아 있도록 배워야 하는 것이 이 춤의 슬픈 장면이다."
나는 나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스코트가 먼저 갈 가능성이 많다고는알고 있었지만, 거의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스코트는 매우건강하고 힘차게 활동했으며 삶에 충실했으므로, 언제나 그렇게 살아갈것만 같았다. 나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 그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고,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떠나갔다. 이제 그이는 더 이상 농장에서 일하지 않고, 트럭 안으로 해초를 던져넣지 않는다. 저녁마다 벽난로 옆에서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을 수도없고, 여행도 떠나지 못하며, 책을 쓰거나 세상사에 대해 설득력있는논평도 하지 못한다. 그이는 나보다 조금 앞서 우리의 조화로운 관계 밖으로 떠나갔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일, 책, 원고, 농장에 관한 일들을 적절하게 결정하여 정리한 뒤 나 또한 홀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이제 떠난다고 해서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특별히 운이 좋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으며, 이제 나날이 되풀이되는 자질구레한 일에서 빠르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만일 저 반짝이는 바다가 가라앉게 된다면, 나는 기쁘게 내몸을 그 속에 잠글 것이다. 그리고 저 너머 도달한 곳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나는 잠깐 숨을 쉬고 주위를 돌아본 뒤에 기꺼이 그 일과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가 가기로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으며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위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코

트가 그랬듯이 음식 먹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목적이라한다면, 음식은 우리를 육체에 매이게 하는 미끼요 독이다. 육체에 음식물 공급을 멈추면, 육체는 기울어져 죽음에 이른다. 죽음은 삶의 모힘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이다.
간디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아마도가장 큰 망상이라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친구들을 사랑하게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실체 때문인데도, 우리는 잠깐 동안 그 실체를 덮고 있던 껍데기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합니다. 실체의죽음, 실체와 이별하는 일은 없습니다. 진실한 우정은 겉껍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실체를 만나고 지켜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Tyana)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될 뿐이다."
스코트는 언젠가 죽은 뒤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장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다르게 묻고 싶네.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우주와 계속해서관계를 유지해가는가? 내가 이르게 된 결론은 삶이 본질에서 아주 다른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일세. 삶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합적인 것이고, 그 복합적인 것의 하나는 삶이 길거나 짧은 지속기간을 갖는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네. 그리고 어떤 조각의 삶이든 이 땅에서 우리 삶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몸의 기관보다는 영속

적이라네."
우리 삶에는 너무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40년쯤 전 남쪽 버몬트에서 살 적에 여러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있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훌륭한 여성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 평화사업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일인칭 대명사가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한 가지 모험스런 제안을 했다.
"하루 종일, 아니면 한 시간, 아니 지금같은 식사 시간만이라도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을까요?"
모인 사람들은 재미있는 실험이 될 거라고 동의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간단한 생각을 표현하는데도한참 생각해야 했고 문장을 다시 짜야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라는말이 끼여들어 성공할 수 없었으며, 말을 하다가도 규칙 위반이라는 외침으로 중단되곤 했다. 자꾸만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서로가 자연스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 게임은 도무지 안 되겠네요! 이런 식으론 얘기가 끝을 보지 못하

겠어요." 마침내 이것을 게임이라고 부른 한 참석자가 그만하자고 말했다. 나는 이 기억할 만한 식사 모임에서 우리가 나날의 대화에서 얼마나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 스스로도 대화 속에서 일인칭을 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지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벙어리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마련이다.
도대체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우리 몸을 나의 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몸 속에서 살지만 몸이 곧 우리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내내 확대되고 중심을 이루는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삶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유일한 실재는전체성 (oneness)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그 자의식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우리는 과연 자기 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뽑을 수 있을까?
이제 나 자신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음을 알고 있다. 회고록의저자로서 수많은 일인칭 대명사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최선의 삶을살고, 배우고, 사랑하고, 마감하는 것에 관한 이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되는 나‘, 나‘, ‘나‘ 일인칭 단수대명사를 어떻게 이야기의 뒷전으로밀어넣을 수 있을까?
인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강연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Khrishnamurti)는 말년에 한 강연에서 경탄할 만하게 비인칭으로 말했다. 그 자신 또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할 때 나‘라는 말 대신에 ‘연사‘가이런 일을 했다거나 ‘연사‘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스코트는 자기 책이나 강연에서 나라는 말을 드물게 썼고, 보통 대화에서도 되도록 적게 쓰려고 애를 써서 나중에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

으며 대화 전체에서 공동체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이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흙을 퍼내어수천 번 외바퀴 수레에 담아 농장으로 나르며 만든 연못도 언제나 ‘우리연못‘이라고 불렀다. 농장도 대부분 그가 심고 가꾸었지만 언제나 ‘우리 농장‘이라고 불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온갖 수고를 다 해지은 집인데도 그의 집이나 우리 집이 아닌 ‘헬렌의 집‘이라고 불렀다.
나는 개체적 자이를 넘어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면 한다.
스코트나 나도 우리 책 속에서 우리의 내면 생활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대부분 대중의 눈에 드러난 삶을 살긴 했어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있기를 더 좋아했다. 스코트가 자서전을 쓰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자서전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서전을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대변혁을 겪은 한 세기에 걸쳐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역사적인 면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이는 정치적 성격을 띤 자서전을 썼다. 나는 무심코 그 중 여섯줄을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책을 스코트에게 바치면서 그이에 관한 추억을 더듬어보니, 우리가 만나기 전의 내 삶의 일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의 일부는크리슈나무르티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지만 내삶은 50년 넘게 스코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므로 이 책은 스코트에초점을 맞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삶에서 태양은 오직 하나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또 그렇게 떠났으며,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은 10대에 내 눈을 부시게 하였으나, 잠깐동안의 에피소드로 그쳤다.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거대한 현시 ()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한다. 우리는 우리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부터 백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되든지 우리들 저마다의 존재 양식, 행위, 생각에 어떤 부분이든 영향을받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와 형제 자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나 자신이 함께 또는 따로 새겨온 표적들이 세상의 모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아마도 이책을 읽을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좀더 너그럽고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3인칭으로 썼다. 그런데 유능한 편집자들이 권고하기를 독자들과 가까워지고 다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 ‘나는‘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애썼지만 편안하지가 않았고 주제넘은 듯 여겨졌다. ‘나‘를 적어넣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를 싫어하며, ‘나‘와 상관없이 남은 여생 (이 책을 쓰는동안을 포함하여)을 보내면 행복하겠다. 그래서 전문가의 충고를 따르지않고 헬렌과 스코트의 이야기를 ‘그 사람‘ 또는 ‘그들‘ 이라는 시점으로 거리를 두고 쓰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침내 장애에 부딪쳐 나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1단 기어와 3단 기어를 왔다갔다하듯1인칭을 앞뒤로 옮겨가며 쓰는 방법을 택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이 책은 이처럼 하찮은 개체성을 넘어서려고 애쓴 뒤의 ‘우리‘와 나‘에 관한 책이다. 내가 때때로 1인칭을 견디지 못하고 ‘그 사람‘ 또는 ‘헬렌‘을 쓰기 위해 3단 기어를 넣더라도 여러분들은참고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 책 속의 열려진 창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짧은 만남이 소개되지만,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스코트 니어링과 나의 관계, 우리의 닮은꼴 생활에관한 것이다. 이 책은 스코트와 내가 같이 쓴 다른 책처럼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공동작업, 농장생활, 식생활, 정원 가꾸기 또는 집짓기에 관한 보

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반세기 넘게 함께 하고자 애써온, 최선의 삶을 살고, 그 삶을 사랑하며 우리가 겪은 여러 가지 출발과 떠남에관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 의 첫 단어Loving‘ 다음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최선의 삶을 사랑하는 것(lovingthe good life)도 중요하지만, 
최선의 삶에 들어 있는 그 특유의 변할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사랑(loving)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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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서관협회가 선정한 청소년 부문 최고의 책,
우주에 남은 마지막 책을 구하라!

요즘은 아무도 글을 읽지 않는다. 누가 굳이 글을 읽으려고 하겠는가? 마인드프로브 바늘을 머리에 꽂기만 하면 온갖 영상과 오락물이 뇌에 직접 복제되는것을!

책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백타임이라는때에 그러니까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잘살있었다는 백타임에나 존재했었다는 책! 대지진 이후 도시 구역이 이런저런깡패집단손아귀에 들어가고, 유전자조작으로 완벽하게 향상된 프루브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인 백타임에 존재했었다는 책!

내 생각엔 그 백타임이라는 것 자체가 진짜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그저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유전적으로 향상된 프루브이고 아빠는 구역의 보스인데 언젠가 나를 구하러 와서다 같이 에덴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그런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런 이야기는 뇌에 바늘을 꽂으면 되는 가상현실 게임에나 있는 일이다. 실제로는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난당해봐서 안다.

그런데, 사람들이 라이터라고 부르는 영감탱이를 만나고 말았다. 말도 안되게 엄청난 생각을 품고 있는 늙은이와 스파즈라는 좀 울적한 이름을 가진내가 힘을 합쳐 세상을 한번 바꿔보려고 했다.

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흥분해서 숨을 헐떡이며 그가 외친다.
"아름다운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이제 그 소녀를살려 낸 거야!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야! 얼른 그 이야기를 써야하는데! 자네가 무슨 일을 해낸 건지 알기나 하나? 내 이야기의해피엔드를 자네가 선사한 걸세!"
하지만 빈을 살린 건 내가 아니고 프루브들이에요."
내가 라이터를 일깨워 준다.
"게다가 에덴에 오자고 한 것도 내가 아니잖아요."
라이터가 고개를 젓는다. 그의 늙고 촉촉한 눈이 내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는 듯하다.
"맞아, 우리 모두 자네를 도왔지. 나도, 라나야도, 심지어 작은얼굴 녀석까지도. 하지만 이 여정을 시작한바로 자네야. 자네가 감히 이 여정을 상상할 용기가 없었다면 아무 일도 해낼 수없었을 거 아닌가."
이 노인네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진짜 영웅이 누구인지안다. 그건 나도 아니고, 심지어 용감한 라나야도 아니다. 진정한 영웅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 다니는 하얀 수염이 난 노인네다. 아무도 읽지 않을 책에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믿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버리지 않고 그 커다란 심장 속에 그 희망을 간직하고 다니는 이 노인네인 것이다.

기밖에 보이는 저런 초록색 물건들 같은 걸 말이야."
"풀이랑 나무 말이구나."
"좋은 이름이야. 평화로운 이름."
빈이 꿈꾸듯 말한다.
"풀과 나무."
라나야가 빈의 손을 잡고 유리창으로 간다.
"저건 홀로그램 풍경이 아니야."
라나야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킨다.
"저것들은 진짜 풀과 나무야."
빈은 바깥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쉰다.
"아름다워. 하지만 홀로그램 풍경과 다를 게 없어."
라나야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우리가 여기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지."
빈이 대답한다.
"그럴 수 있어? 내가 나으면 우릴 다시 돌려보낼 거잖아. 회색콘크리트에 산성비가 내리고 구역 폭력배들이 싸움을 하는 그곳으로."
라나야가 풀과 나무를 쳐다보다가 빈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이 빛을 발하고, 치열한 표정이 떠오른다.
"방법만 있으면 보내지 않을 거야."

는 뜻으로 보인다.
"죄를 인정하는가?"
나이 든 지도자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라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언덕 끝까지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규칙을 어기는 일이라면, 그 규칙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많은 지도자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두드린다.
"설명을 해 보거라."
"저 사람들이 제 목숨을 살려 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싶었습니다."
"라나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도록 해라."
지도자가 재촉한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어볼 수 없으니."
라나야가 지도자에게 절을 한 다음 말을 잇는다.
"라일라 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라일라 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 앉아서 라일라 님이 하신 일을 제가 이어서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지요. 라일라 님만큼 잘할 수 있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굳이 내 호감을 사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라일라가 잘라 말한다.

"그리고 이 보통 사람, 부모도 없는 소년, 모두가 천대하고 피하는 이 소년은 저를 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누이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에덴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 누이동생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알고 제가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프루브들 몇몇이 라나야의 말이 맞다는 듯한 소리를 내기는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저 소녀의 병은 우리가 가진 기술로 쉽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도시 지역을 휩쓸고 있는 전염병을 고칠수 있는 기술을 우리는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만 있고, 굶주리는 것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구역이 불에 타들어 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행동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저는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언덕에 앉아 있는 군중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온다. 라나야가 지나치게 과격한 발언을 한 것이다. 누군가가 소리친다.
"저들을 봐! 추하잖아! 괴물 같아! 멍청하고! 저들은 보통 사람들이야!"
라나야는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손을 들어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킨다.

다. 잘빠진 프루브용 택비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콘크리트상자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오, 즐거운 나의 집!"
내가 처음 털었던 그 쓰러져 가는 상자를 보고 라이터가 그렇게 외친다. 이상한 건,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이터는 자기 상자로 돌아온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
"사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에덴에서 살았어도 좋았겠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그랬다면 내 얼굴에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을 테고. 하지만 그랬다면 내 책을 끝낼 수 있었겠나? 인생이 완벽하다면 책에 쓸 만한 말이 하나도 없지. 한가롭게 노닐고, 다늙은 발을 깨끗한 물이 흐르는 시원한 냇물에나 담그면서 시간을 보내면 책에 쓸 말이 뭐가 있겠나? 작가한테는 도전이 필요하지. 우리는 투쟁과 쟁취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거든."
라이터는 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에 턱을 괴고 웅크리고있는 쪽을 살펴본다. 그의 작은 상자는 거의 텅 비어 있다. 책상으로 쓰는 낡은 나무 상자와 그가 ‘책‘이라고 부르는 두터운 종이 묶음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늙은이 냄새가 나는이곳이 나는 너무 싫다. 도시 지역 전체에서 나는 늙은 냄새와다 쓰고 버린 폐품 냄새, 그게 너무 싫어서 참을 수가 없다.
라이터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내 옆에 앉는다. 쭈그려 앉는 것이 어려웠는지 앉으면서 신음 소리를 낸다.
생각에 잠겨 숱 적은 자기 턱수염을 어루만지더니 마침내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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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를
우연히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지만 부리에 쏘일 것 같아
선뜻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담담하게 외로움을 견디는 오늘의 우리에게표명희가 전하는 다정하고도 힘찬 위로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평범한 청소년들이다. 작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 낸다.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이 20만 명이 된 한국 사회에서 친구 중 한두명은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을 테고, 네 가정 중 한 가정이상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며, 한부모가족 또한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참사, 역사적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일이거나 이웃의 일일 가능성이 크다.
작가가 세밀하게 그려 낸 한국 사회의 현재가 너무 생생해서일까. 소설 속 인물 하나하나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편의점 혹은 학교 복도에서 만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고, 공감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중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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