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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소작농 :: 월세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유대인 동료가 알려 준 이야기다. 많은유대인이 아이가 태어나면 금반지 같은 현물 대신 현금을 모아서 아이 이름으로 펀드에 투자하고, 장성해서 결혼할 때 그 돈을 종잣돈삼아 집을 구매한다. 미국은 집값의 10퍼센트 정도만 있으면 대출을받아 살 수 있다. 당시 좋은 집은 50만 불, 우리나라 돈으로 5억 정도했었으니 5천만 원만 있으면 집을 사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동료는 종잣돈으로 집을 사고 매달 월세를 내는 대신 은행 대출을 갚아 나갔다. 반면 나는 계약금 5천만 원이 없어서 월세를 전전했다. 당시 나는 월급의 절반 정도를 월세로 내야 뉴욕 근교에서 생활이 가능했다. 그렇게 7년을 살았다. 월세가 1백만 원 조금 넘었으니84개월 동안 지출한 월세가 1억 가까이 된다. 만약에 내가 집을 사고시작했다면 1억은 나의 자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반면 유대인 친구가구입한 주택은 가격이 계속 올랐다. 나와 그 친구는 같이 시작했지만부의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월세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사람들은 임대 주택에서 월세로 살면서 돈을 모아 나중에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문제는 집값이 계속 올라간다는것이다. 정부는 매년 최소 2퍼센트 이상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노력한다. 통화량이 많아지니 인플레이션은 계속되고, 돈의 가치는 점점떨어진다. 같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으면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집값이 폭등하고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사야 하는 세상이 되면 두 집단은 좋아한다. 
바로 대자본가와 정치가들이다. 
빈부 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의 집중을 얻게 되고, 정치가는 집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임대 주택을 구걸하는 표밭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당을 잡으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악당과 그 악당을 손가락질하면서 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위선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당과 위선자 사이에서 국민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만드는 사회에서 권력은 쪼개서나눠 가질수록 정의에 가까워진다. 돈은 권력이다. 따라서 부동산 자산은 권력이다. 부동산이 정부나 대자본가에 집중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서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정의로운 사회다. 내아이를 위해서 거대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기업가가 착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부동산 자산이 나누어진 사회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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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오래 간다
빨리 안 읽어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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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했기 때문에, 아니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와 신뢰도를 지우거나 피해자를 겁줘서 침묵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일부 가해자들은 규칙이 어느 정도는 벌써 바뀌었다는 사실에 확연히 당황한 모습이다.
경청되고, 신뢰받고, 존중받을 자격을 얻는 문제는 그동안 너무 많은 여자를 침묵시켰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경우에 여자들의 목소리는 영영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지금 이 사연들은 알려졌지만, 우리는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사연들이 얼마나 더 많을 지도 기억해야 한다. 
과거 여러 세대의 여자들처럼 이미 죽어서 조용해진 피해자도 있을 것이고, 아직 과감히 목소리를 낼 공간을 못 찾은 피해자도 있을 것이고, 입을 열었지만 조롱과 망신만 당하거나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공격당한 피해자도 있을 것이다. 
드코테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한달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논하는 대화가 크게 변한 시기였습니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에게 버겁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무척 고무적인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를,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의 시작이기를바랍니다."

열두살에서 서른살 사이에 나는 날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그저 살아남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낮모르는 사람이나 가볍게 아는 사람이 내 젠더 때문에 내게 모욕과 피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불운을 피하려면 내가 한시도 빠짐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 정말이지, 그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지구가 환경적 관점에서 거주 가능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열심히 걱정한다. 하지만 지구가 여자들에게 온전히 거주 가능한 장소가 되기 전에는, 그래서 여자도 거리를 안전하게

했다는 혐의를 다르게 표현했다. 
"난 사람들에게 약을 했답니다. 사람들은 약을 원하지 않았죠." 폴러가 조롱에 가세하고, 카메라는 청중석을 한바퀴 죽 돌며 보여주는데 그곳에 앉은 유명인사들 중 일부는 강간 반대 농담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다른 일부는 꼭 자동차 전조등 앞에서 굳어버린 사슴 같은 표정이었다.
코스비는 추락했다. 버리스가 포문을 연 뒤 주류 언론의 기자들과 생존자들의 증언이 줄 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2015년 1월, 코미디의 위풍당당한 종조부쯤 되는 제이 배Jay Leno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여자들 말을 왜 그렇게 못 믿는지 모르겠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남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면 여자가 두 명 있어야 한다죠. 그런데 여기서는 스물다섯명이나 필요하잖아요." 
거물 코미디언이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특별한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페미니즘 코미디의 주류 진입과 강간문화의 약화를 뜻했다. 이보다 더 극명한 수문장교대식은 없었다.
빌 코스비는 그런 연쇄 범죄 혐의를 받고도 그동안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신뢰성이 전혀 없고 목소리가 거의 없는 문화, 여자가 그에게 강간 당했다고 신고하면 오히려 더 공격받고 그는 면책되며 힘이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문화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면책권을 잃었고, 힘의 대부분을 잃었다. 

다들 코치를 미워한다. 슈머는 코치의 좋은아내 역을 맡아, 새 학교에서 코치의 일이 점입가경으로나빠지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점점 더 큰 잔에 백포도주를 담아 들고 나타난다.
시작 장면에서 라커룸에 모인 풋볼팀은 코치의 ‘강간 금지‘ 규칙을 빠져나갈 허점을 찾으려고 애쓴다. 
"어웨이 경기에서는 강간해도 되나요?" 
안 돼. 
"핼러윈인데 여자애가 섹시한 고양이처럼 입었으면요?" 
안 돼. 
"여자애는 강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아니면요?"
그래도 안 돼.
 "우리 엄마가 지방 검사라서 기소하지 않을 거면 강간해도 되나요?" 
"여자애가 딴 날 저한테 좋다고 말했다면요? 다른문제에 관한 거였지만." 
"여자애가 좋다고 말해 놓고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마음을 바꾸면요?"
고등학생들의 이런 논증은 우리가 대학 캠퍼스와 댓글창에서 접하는 논리 혹은 비논리와 정확히 같은 종류다.
이것은 남자의 권리에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혹은 여자의 권리가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뒤에 나오는 장면도 훌륭하면서 소름 끼치는데, 
중년 여자들이 코치더러 "우리 아들들"의 정당한 강간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며 침을 뱉는 장면이다(현실에서 젊은 여자가 스포츠스타의 강간을 고발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화내는 것, 피해자가 받은 충격이 아니라 가해자가 받을

그 운 나쁜 사고로 인한 임신을 포함하여 모든 임신의 책임으로부터 면제해준다. 
그 다음에는 많은 가난한 여자들이 너무나 오래 비난 받아온 현상, 즉 아빠 없는 아이를 생산한 책임으로부터도 면제해 준다. 세상에는 아빠 없는 아이들의 아빠가 무수히 많다.

우리는 여성혐오가 없는 평행우주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 남자들은 자신의 몸에는 여자의 배를 부풀려 아홉달 동안 임신하게 하고 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경고를 듣는다. 
상대의 동의 없이, 계획 없이, 장기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임신 가능한 사람의 몸에 그 물질을 집어넣고 다니는 건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이고, 인간으로서 부족한 그건 그렇고 툭하면 여자는 부족하다고들 말하는데 대체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짓이라는 지적을 듣는다. 
하지만 현실에는 이런 식으로 꾸짖는 말은 별로 없다. 
여자가 임신으로 남자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말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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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리치는 거짓말, 비밀, 침묵에 관하여」On Lies, Secrets, and Silence 라는 에세이선집을 냈다. 앞에서 인용했던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대한 비평이 이 책에 실려 있었다. 책의 다른 글에서 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의 침묵 깨기 덕분에 인생이 바뀐 여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뇌세포에 흐릿하고 의심스러운 윤곽으로 담겨 있을 뿐차마 꺼내 물을 순 없었던 어떤 질문이 계기가 되어 불현듯 어떤 여자, 오래전 죽은 여자, 그 삶과 경험을 그저 어렴풋이 상상만 해볼 수 있는 여자가 남긴 어떤 문장이나 글귀나 이미지를갑자기 이해하게 되었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떠올릴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한때는 물을 수 없었던 질문들을 이제는 물었다. 1980년 리치는 「의무적 이성애와 레즈비언의 존재Compulsory Heterosexuality and Lesbian Existence라는 기념비적 에세이를 평론 목록에 더했다. 이 글에서 리치는 전체 여성 중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이들의 정체성과 활동이 간과되거나 배제되고 있다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삶의 가능성과 이해의 가능성마저 왜곡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마녀, 독신녀, 비혼주의자, 미혼 여성, 자율적 과부, 그리고/혹은 레즈비언으로서 그동안 다양한 수준으로협력을 해오지 않았던 여성들의 역사를 무시했다. 하지만 바로 그 역사야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배울 것이 너무나 많은 이야기, 전체적으로 침묵이 너무 두껍게 덮여 있는 이야기이다." 
리치는 훌륭한 탐험가였다.
리치는 이성애가 규범으로 통용되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성애자로 태어난다는 가정은 많은 여성에게 이론적·정치적 장애물로 기능한다. (…)이성애를 일종의 관습으로서 점검하기를 거부하는 것은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나 인종차별적 카스트 제도가 다양한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리치는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침묵시켜왔는지를 말하고,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강제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선전되고, 힘으로 유지되어야 했던 것" 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마치 물리적 도시가 건설되는 것처럼, 여러 사업과 노동과 결정과 욕망이 누적됨으로써 새로운 생각과 가능성의 도시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에 여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페미니즘은 인식에 따르는 기쁨과 분노, -그리고 설령 끔찍한 내용일지라도 인식했을 때 얻게 되는 힘으로 가득했다.

1993년 철학자 레이 랭턴Rae Langton은 탁월하고 엄밀한 에세이 말하는 행위와 말할 수 없는 행위」Speech Acts and Unspeakable Acts에서 이주제를 다루었다. 
랭턴의 탐구와 분석은 포르노그래피를 넘어선 영역에까지 빛을 비춘다. 랭턴은 우선 논쟁의 초점을 재설정하여,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하는 일, 말이 품은 힘에 주목한다. 
그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언어를 써서
결혼하고, 투표하고, 평결하고, 명령한다. 
혹은, 우리에게 그럴 힘이 없을 때는, 하지 못한다. 주인이 노예에게 "먹을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건 명령이지만, 노예가 같은말을 하는 것은 호소다. 

랭턴은 포르노그래피가 그저 오락만은 아니며 지침의
‘로도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자아이들과 젊은남자들 중 많은 비율이 남자의 만족을 권리로 여기지만 
여자의 권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를 인용하고, 
데이트 강간 통계와 고통스러워하는 여자를 에로틱하게 느끼는 남자들에 관한 통계를 나열하며, 이런 현상들이 모두 포르노 문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랭턴은 침묵을 세 종류로 나누었다. 
첫번째는협박이나 패배에 따라오는 문자 그대로의 침묵이다. 
두번째는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듣는 사람이 없는 경우, 반응이 없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랭턴은 이렇게 말했다.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이 자신의 말로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여성을 침묵시킨다."
이 세번째 종류의 침묵은 "누군가 입을 열었을 때, 말을뱉었을 때, 그러나 (・・・ ) 그 말로 의도했던 행동을 수행하는데는 실패했을 때 생겨난다." 
그 행동이란 금지하는 것, 싫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누군가의 말하는 행위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 그를 침묵시킬수 있다. (・・・) 
가령 ‘싫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두 이 단어로 어떤 일을 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포르노그래피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지침으로 작용하고, 그 지침이 그들로 하여금 여성의 목소리를 못 듣도록,
심지어 자기자신의 목소리도 못 듣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침묵은 여러 갈래의 길로 움직인다.
가끔 나는 포르노란 남성의 특권을 더욱더 강화하고 여성이 획득한 힘에 대한 복수 행위를 쉼 없이 상연함으로써 남자들에게 보상을 안기는 평행우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몇년 전, 샘 벤저민 Sam Benjamin은 주류 포르노의 수도라고 불리는 샌퍼낸도밸리에서 신출내기 감독으로 일했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게 명시적으로 주어진 임무는 여자들을 확실히 발가벗기는 것이었지만, 감독으로서내 진짜 책임은 여자들을 확실히 벌주는 것이었다.") 
요즘의 무수한 포르노들은 무수히 다양한 형태를 띠며, 그중에는 분명 예외도 많다. 하지만 주류 포르노들은 대체로 에로스의 힘을 보여주기보다는 힘의 성애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성애로 묘사되는 행위 가운데 많은 부분은 사실 남성적 승리에 대한 동성애적 매혹이다. 그것은 여성이 끊임없이 패배하는 모습에서 흥분을 느끼는 스포츠에 가깝다.

온라인에서 여성을 침묵시키려는 최근의 이런 움직임은 끝나러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것은 반발이다. 
지금까지 전진한 것들을 뒤로 물리려는 시도, 지금까지 들린 목소리들을 도로 침묵시키려는 시도다.
세상에는 늘 말해지지 않았지만 말해져야 할 것들이 있을 테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언어와 의지를 찾으려고애쓰는 여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 세상을발명하고, 그 세상을 만나는 자아를 발명하고, 그 세상 속에서 타인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거나 닫아버린다. 침묵은 늘 깨지고 있고, 찰랑찰랑 밀려온 파도가 발자국과 모래성과 물에 씻긴 조개껍데기와 해초를 덮는 것처럼 다시 차오르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그동안 젠더에 대한 생각을 고쳐 쓰고 침묵을 깰 권리에 도전함으로써 세상을 다시 써은 페미니즘의 위대한 경험은 놀랍도록 성공적이었지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수천년 된 사회적틀을 바로잡는 일은 한 세대나 몇십년의 작업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나긴 시간을 들여야 하고 종종 전투에도휘말려야 하는 창조와 파괴의 과정이다. 그것은 참으로 사소한 일상의 몸짓과 대화뿐 아니라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에서 법 - 신념 ·정치·문화를 바꾸는 일까지 포함하는작업이고, 가끔은 전자가 누적되어 후자가 이루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나는 『걷기의 인문학』에서 젊은 여자였을 때 겪었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발견은 집 밖에서는 사실상 내게 삶,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가 없다는 것, 세상에는 그저 내 젠더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해치고 싶어하는 낯선 이가 많다는 것,
섹스가 너무 쉽게 폭력이 된다는 것, 이것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이 내게 해준 조언은 이 상황이 잘못되었으니 바뀌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내 생활을 바꾸거나 제한하라는 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것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고방식이다.

공공 공간을 (혹은 남자들을 바꿔서 여자들이 괴롭힘 당하지 않고 길을 걸을 권리를 찾아주자고 말하는 대신에 여자들에게 공공 공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 심지어 그냥 포기하고 집 안에만 있으라고 말하는것 말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

(바로 이 과정에서 억울해하는 남자들이 반복해서 옮는 표현인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 (Not all men)가 예를 들어 "모든 남자가 다 강간힘은 아니야" 처럼 쓰인다 #yesallwomen (여자들은 다.
겪는다)으로 예를 들어 ‘여자들은 다 어떤 식으로든 강간에 대처해야 해" 처럼 쓰인다 변형되었다.)많은 남자들은 이때 소셜미디어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여자들의 말을 귀담아듣고서 여자들이 오래 견뎌온 현실을 일생 처음 깨달았다.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남자들이 등장한 것은 2014년에 새롭고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신호였다. 이것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달리 말해 오래전부터 여성혐오적 행동을 자랑스레 뽐낼 만한 것으로 여겨온 일부 남자들이 받아들이고 칭송하는 가치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들은 공개적으로 글을 써서, 자신은 여자들이 어떤 적의와 위험을 매일 접하고 살아가는지 처음 알았으며 이제야 그것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페미니즘은 여자들의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백인들의참여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인종차별을 다룰 수 없는 것처럼, 여자들은 남자들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성차별을 완화할 수 없다.

부족했기 때문에, 아니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와 신뢰도를 지우거나 피해자를 겁줘서 침묵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일부 가해자들은 규칙이 어느 정도는 벌써 바뀌었다는 사실에 확연히 당황한 모습이다.
경청되고, 신뢰받고, 존중받을 자격을 얻는 문제는 그동안 너무 많은 여자를 침묵시켰다. 그래서 너무 많은 경우에 여자들의 목소리는 영영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지금 이 사연들은 알려졌지만, 우리는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사연들이 얼마나 더 많을지도 기억해야 한다. 과거 여러 세대의 여자들처럼 이미 죽어서 조용해진 피해자도 있을 것이고, 아직 과감히 목소리를 낼 공간을 못 찾은 피해자도 있을 것이고, 입을 열었지만 조롱과 망신만 당하거나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공격당한 피해자도 있을 것이다. 
드코테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한달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논하는 대화가 크게 변한 시기였습니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에게 버겁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무척 고무적인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기를,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의 시작이기를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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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낼 때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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