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러 모로 뛰어난 미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30대 중반의 여인, 가지이 마나코. 


자신과 함께 지냈던 남자들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수감중인 그녀를, 주간지 기자인 리카가 취재활동을 통해 파악하고 또 그로 인해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자신을 깨닫는다.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상이란 무엇인가, 욕망(그중에서도 특히 식욕)과 사회적 규범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얽혀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성성, 그리고 남자들이 바라는 여성성의 대립이 얼핏보면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도 있는데… 글쎄, 개인적인 느낌이라면 페미니즘은 ‘투쟁’의 느낌이 강한 반면, 이 소설에서는 ‘자아 성찰’에 더 가까운지라 약간 방향이 다른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이념적 주제는 소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동을 받게 되는 건 역시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음식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와, 여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인간성과 인생 철학에 대한 통찰이 빛나기 때문이다.


“저기, 지금, 마가린이라고 했어요?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여자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페미니스트와 마가린. 만약 내가 다음에 당신과 얘기한다면, 당신이 절대 마가린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일 거예요. 나는 진짜를 아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싶거든요.”


“버터를 한 조각 밥에 올렸다. 금세 쌓이기 십상인 편의점 도시락의 1회용 간장 봉지를 뜯어서 한 방울 떨어뜨렸다. 지시대로 버터가 녹기 전에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리카의 목 안에서 신기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차가운 버터가 먼저 입천장에 서늘하게 부딪혔다. 갓 지은 밥과 버터의 대비가 질감, 온도와 함께 선명해졌다. 차가운 버터가 이에 닿았다. 부드럽게, 잇몸에까지 스며들 것 같은 식감이다. 이윽고 그녀의 말대로 녹은 버터가 밥알 사이로 흘러넘쳤다. 정말로 황금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수하고 향기로운 큰 파도가 밥에 엉키며, 리카의 몸을 저 너머로 흘러가게 했다.”


“요리책에 소금 적당량이나 소금 약간, 이라고 나오지? 요즘은 그렇게 개인 재량에 맡기는 표기를 하면 항의가 들어온다고 요리책 편집하는 지인이 말해주더라. 뭐랄까, 절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적당량을 가늠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어. 요리란 시행착오인데 말이야.(중략) 한 가지만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에서 남들 수준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각자 자신의 적당량을 즐기고, 인생을 전체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그러려면 자신의 적당량을 모르면 안되겠지.”

“그러게. 그래서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고 자신에게 맞는 맛과 양을 찾아야 할지도.”


“직업이나 나이, 결혼 여부, 아이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건 우리 전혀 몰라요. 직장은 고사하고 이름도, 정말로 성을 뺀 이름밖에 몰랐어요. 아는 것은 각자 좋아하는 식재료와 싫어하는 식재료, 나페가 가능한가, 프랑스에 치즈 여행을 가보았는가, 어느 백화점 지하 매장을 좋아하는가, 식탁을 꾸밀 때 참고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그런 게 우리한테는 무엇보다 소중한 프로필이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부이야기 2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엠마, 셜리 등으로 유명한 (그리고 그 특유의 오타쿠 기질과 장인정신으로 더 유명한)
모리 카오루의 다음 작품, 신부 이야기.
배경은 중앙아시아. 어린 신랑에게 시집간 젊은 처자의 이야기.
아직 2권까지밖에 나오지 않은 관계로 큰 줄거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지만
양탄자에 자수넣기나 토끼사냥 등 소소한 이야기만으로도 나름 재미있다.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 대원씨아이, 2010.
 

특히 이 작가의 오타쿠 정신은 융단이나 나무기둥 조각, 유목민 의상 등을 그려낼 때 빛을 발한다.
스크린톤을 바른게 아니라 하나씩 펜으로 선을 그어 그려낸 그림들.
2권에서 나왔던 대사처럼 이 그림에는 "정신이 아득해질만한 시간과 수고, 그리고 마음과 기도가 깃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야식당 1 심야식당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음식을 주제로 하는 만화는 많다.
요리만화보다는 적지만 이러한 음식들이 보여주는 인간관계를 다루는 만화 역시 많다.
하지만 요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식사를 소재로, 이와 얽힌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만화는 그닥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심야 식당은 우리에게 뭔가 좀 더 깊은 차원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보통 사람들에게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와인을 마시며 넓은 꽃밭의 춤추는 여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식객'에서 시장표 돼지국밥을 먹는 장면은 이보다는 친숙하지만, 그래도 어쩌다 가끔 접할뿐 매 끼니마다 먹기 쉬운 음식들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엔 웹툰 중심으로 그야말로 집에서 해먹는 요리와 관련된 이야기도 종종 올라온다.

yami. 코알랄라. (http://cartoon.media.daum.net/series/view/koala/29)
 

하지만 어찌보면 이정도도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의 전유물일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경우 이마저도 귀찮아서 스팸이나 참치 통조림 한깡통 따서 밥과 함께 먹거나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인 라면 정도 끓여먹는 것이 일상생활 사람들.
그렇기에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쉬운 음식일수록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심야식당은, 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해먹는 밥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기본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과 맥주, 청주, 소주뿐.
하지만 재료만 있다면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만들어준다.
어제 만들어서 하루 묵혀둔 카레라이스, 문어모양으로 구운 소세지, 달걀 샌드위치, 버터라이스 같은 것들.


 

아베 야로. 심야식당 제 1권. 2008. 도서출판 미우.
 

이렇게 간단한 음식일수록 평범한 사람들이 집에서 해먹는 빈도가 높은 건 당연한 사실.
그리고 가끔 가다 한번 먹는 요리에 비해 몰입도 역시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뜨거운 밥 위에 구운 김 한장 싸먹을때의 그 맛, 그 느낌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며
만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에 친근하게 접근하게 된다고나 할까.

게다가 심야식당의 영업시간이 밤12시에서 새벽 6시반까지인 만큼,
그 고객들 역시 야근 끝낸 회사원에서 밤업소 종사자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그 모습의 인간 군상들이 겪는 일들을 보면
밥과 간단한 반찬 하나 대충 차려먹는 사람들끼리의 동질감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열대
유재현 지음, 김주형 그림 / 월간말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가끔 목적없이 도서관 가서, 정처없이 휘적휘적 걸어다니다가 눈에 띈 책을 골라잡고 읽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책, "달콤한 열대"도 그런 식으로 건진 책이다.
전체적으로는 저자가 여기저기 여행다니면서 먹었던 맛있는 열대 과일들에 대한 이야기.
색깔 예쁘게 넣은 열대 과일의 그림을 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임팩트가 컸던건 3장, '바나나 - 추억과 공화국 전쟁' 편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집어먹던 바나나가 알고보니 독재정권의 자금줄이었던 것.
이게 두배로 충격이었던 이유는, 당시에 즐기던 커피쪽에서도 공정무역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기분'이랄까.

그리고 좀 더 찾아봤는데, 사방팔방에 이런게 널려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커피, 차, 초콜릿, 바나나, 설탕, 고무, 목재... 심지어는 청바지까지.
어느 정도냐면, 불공정무역 제품을 모조리 보이콧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

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공정무역 캠페인, 쓸모없다"는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활동을 하는 분들을 존경하니까.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 한푼이라도 더 돌아가게 하기 위해 몇걸음이라도 더 걸어서 공정무역 커피를 취급하는 카페에 간다거나, 좀 더 비싼 공정무역 초콜릿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사는건 그야말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행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념에 따른 개인의 행동일 경우이고, 이를 남에게 강권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한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생각은 해묵은 개고기 논쟁과 동물학대 관련 서적을 보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는데...
도살당하는 개들이 불쌍해서 개고기를 안먹는다? 물론 좋다. 개가 불쌍하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이를 강요한다? 그러려면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돼지나 닭은 먹으면서 왜 개고기만 비판하는가..라는 논쟁을 피할 수 없다.

스타벅스가 커피농가를 착취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다는건 좋다. 100가지 잘못된 사회에서 한가지라도 고쳐보려는 노력이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도 가지마'라고 하기엔, 사람은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다르고, 관심을 갖는 분야가 다르다는게 문제.
어떤 사람은 커피가 아니라 바나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할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공정 무역보다 환경 오염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들 신경쓰는것보다 우리나라에서 함께 사는 불우이웃 돕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할수도 있으니까.
이러한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욕얻어먹기 십상일듯.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냥꾼의 현상금 견인 도시 연대기 2
필립 리브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견인도시 연대기, 제 2권. "사냥꾼의 현상금"
전쟁으로 인해 자원이 바닥나자 사람들이 도시를 들어내서 바퀴 위에 얹고 달리며 보다 작은 도시들을 집어삼키는 미래 세계.
전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런던 출신 견습 고고학자 톰과, (미녀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전형적인 막무가내 여성 모험가 헤스터가 다시 등장한다.
비행선 제니 하니버를 물려받아(?) 여행을 계속하는 커플.
얼음 도시 앵커리지와 아메리칸 드림을 주장하는 페니로얄 교수, 반견인도시연맹의 급진주의자들인 그린 스톰과 안나 팽의 부활,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던 엉클의 등장, 거대도시 아크에인절의 숨막히는 추격...

이건 뭐 너무 많은 사건,사고 소식에 9시 뉴스 전체가 할당된 느낌.
전편인 모털 엔진도 물론 그닥 단순한 줄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흐름의 이야기가 두세개 정도 섞여있었다면
사냥꾼의 현상금은 그야말로 크고작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면서 정신없는 모험 활극이 계속된다.
그나마 다행인건 우울하고 암담한 느낌은 그나마 좀 덜하다는거.
간혹 가다가 몇가지 말장난을 통해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SF모험소설이다.
그닥 깊이가 깊은건 아니지만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할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