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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한산성'
책장 넘기던 그 때, 여름 햇살의 힘줄은 굵고 팽팽했으나 나는 슬퍼서 추웠다.
무릎 꿇은 자, 누구인가. 한 나라의 왕이 아니던가. 왕은 개인이 아니며 개인이 아니므로 왕의 패배는 이 나라 만백성의 패배다. 패배한 날의 치욕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스러움은 허구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날의 숨결 속에 살아 펄떡이며 우리를 옥죄고, 하여 곳처에 영웅 이야기는 널려 있고 지천으로 널린 영웅 이야기에 사람들은 매번 지치지도 않고 환호한다. 서둘러 희망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싶은 것이다. 그 가엾음은 또 내 것이기도 하여 나는 자주 슬픔에 등 돌리고 고통에 눈감았으며 등 돌린 다수를 방패삼아 볕드는 쪽에 숨어 있으려 했다.
그런데 이 책, 이 문장들은 그 치욕을 감내한다. 희망으로 숨어들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통을 고통으로 살아내는 문장들. 나는 패배한 나라 안에 숨을 곳 하나 없는 백성이 되었다.
'남한산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천상은 올려다 볼 수는 있으나 갈 수는 없어 멀고, 발가벗겨진 치욕을 치욕으로 감당하며 사람은 지상을 산다. 패배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지구 어느 귀퉁이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한 나라라는 울타리를 엮어 살아가는 후손들은 지금 무엇에 무릎 꿇고 또 무엇으로 다시 새날을 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