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8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놓고 내 심장 소리가 손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듣는다. 아직 살아 있구나. 죽음이란 쉽게 찾아 오는 것이 아니지. 기표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그 곳을 떠나 버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삶을 사랑해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지만 결말이 죽음이 아닌 것은 내게 다시 쳐다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우리를 생각하시는지, 우리 걱정에 잠 못 이루셨던 기억은 있는지.'하는 생각을 한다.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편지로 이야기했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후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바라볼 때면 가끔 이런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또 얼굴을 마주 대고 앉아 이야기를 할 때 '그 눈빛에 담긴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는 표정은 진실인지 아니면 단순한 책임의식인지요?' 하는 말이 입에서 꼬무락거린다. 하지만 말하고 싶어도 말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알량한 착한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께서 도와 주시려고 벌이시는 이해와 태도를 하게 된다. 기표의 선생님에게는 그런 알량한 노력도 없어서 내 사소한 동정심도 보태지 않고 계속해서 내동댕이쳤다.

나는 피해자의 모습을 한 기표이다. 그가 받는 구원의 내용과는 정 반대의 것이지만 결국은 같은 형태이다. 바탕에 있는 진정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 치기 어린 동정은 무서워서 살 수 없게 한다. 그 천진하고 순수한 뒤에 살아 있는 배신과 살기를 띤 눈은 도망치게 만든다. 이 곳의 이런 슬픈 비슷함이 내 자리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인다. 아이들의 내뱉는 숱한 욕과 비웃음은 이미 익숙하여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과 혼자 있을 수 있는 용기로 나를 한 겹 싸고, 가식적인 힘을 내세우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행동을 하여도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나로 만들고, 그런 아이들을 따르는 또 다른 무리의 아이들을 깔아 내리는 자만심까지 갖춘 모습으로 이제는 가만히 웃고 앉아 있는 자리가 내 자리이다. 그리고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그 자리는 외롭고 슬프지만 아프지는 않다. 아마 그게 떠난 곳에서 그는 나처럼 아픔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낯선 사람이 내게 위선을 보이는 사람보다는 따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가출을 탈출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선생님처럼 결국 자신을 위해 이해하는 척할 뿐이고 도와 주는 모습을 겉으로만 보일 뿐이다.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것인가?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한 모든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은 자신을 위해 한 일이다. 나도 다른 이를 위하며 살고 싶다는 작은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몸짓이라고 곧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도와 주면서 다른 사람을 위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형우는 심한 착각에 빠진 위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도 어쩌면 허위에 빠져 진실인 듯 여기는 그와 같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 간의 사이가 우주가 팽창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고 아직은 덜 아문 상처를 한 번 본 후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를 가만히 지켜 보기도 한다. 그것이 그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면서 내 상처도 아물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선홍색 피가 힘차게 내 몸을 돌며 아름답게 할 것이라 느낀다. 그를 뒤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여 준 잔인함이 내 가슴에 품고 있는 잔인함과 같아서 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악마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동작에서 자기 방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댈 수 있게 편한 마음으로 시간이 흘러 생명의 날개를 달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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