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대만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우선 작가의 이력이 이채롭다. 불과 17세의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어 대만 문학의 총아로 떠오르다 갑자기 이런 저런 직업을 거치면서 최근에는 건설사 대표라 한다. 나이 30에 절필하곤 30대 후반에 다시 문학을 시작했다 한다. 이 책은 2015년도에 나왔는데, 책 뒤에 실린 세 명의 대만 평론가들의 말을 보자면 그전부터 좀 묵직한 분위기의 소설을 써온 거 같다.
중국어 원문 그대로 번역한 제목으로 의미가 심상치 않다. 벚꽃인데, 적의 벚꽃이다. 적은 은행의 이사이자 고향에서는 넓은 고택을 지닌 유지와 자선가로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추악한 행동을 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뤄이밍 羅毅明). 그는 만개한 벚꽃처럼 화려하고 명망이 있다.
적의 반대편에 있는 '나'는 소설의 화자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뒤 5년 정도의 시점이 흘러 우연히 이 두 남자가 조우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훌쩍 과거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모진 환경에서 자랐다. 학교의 소사 즈음 되는 비천한 대접을 받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교통사고로 중증 장애를 앓는 어머니, 열악한 가정환경에 짓눌려 있다. 어느날 곗돈을 갖고 도주한 계원으로 인해 아버지는 어두운 방법으로 타개해보려 하지만 결국 몰락은 막을 수 없었고 연못에 빠져 자살한다. 어머니 역시 얼마 안 가 사망한다. 나는 홀홀단신, 가난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가다 인생에 한 줄기 빛같은, 순수하고 소박한 여자(추쯔 秋子)를 만나 결혼한다. 신혼생활에서 검약하며 살아가다 아주 우연하고 사소한 한 가지 일로부터 마치 나비효과처럼 파국을 몰고 올 아내와 뤄이밍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직장에서 차츰 인정받던 '나'에게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다. 하지만, 돈이 없다. 순박한 아내는 남편을 위해 백방으로 돈을 빌리려 하나 여의치 않았고 마침 뤄이밍으로부터 거액을 대출받을 수 있게 된다. 아내는 하루 외박하고, '나'에게서 아무 말없이 뒷모습만 남기며 떠나가 버린다. 아내를 통해 대출받은 돈도 허망하게 강도에게 뺏긴다.
이 소설은 아내의 떠남 이후로 장중한 독백이 이어진다. 그의 심리가 줄곧 묘사되며, 아이러이니하게도 뤄이밍의 딸 뤄바이슈가 매일 같이 카페를 하는 그에게 찾아와 명확히 규명해 놓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모두 짐작하고 있는 아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며 '나'를 마주한다.
'나'는 그 어떤 비난도 뤄이밍 부녀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지만, 회사를 접고 그 고장에 와서 카페를 차리고 있는 '나'의 존재만으로도 뤄이밍은 자살 시도를 하고 피폐해져 간다. 봄날 벚꽃처럼 만개하던 그, 담장을 넘어 가지를 뻗치던 벚꽃 나무(복숭아꽃같기도 한 벚꽃이 담장 밖으로 뻗어나간 것은 남의 아내를 탐내는 그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름에서부터 마치 가을처럼 쓸쓸하고위축돼 있으며 아련한 상흔을 지닌 아내 추쯔.
이 소설을 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로 시대배경이 나오지만 마치 사극 속에서 눈빛만으로도 사랑을 표현했던 남녀처럼 고전적인 분위기다. '나'는 아내에게 헌신하고 결혼의 순결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아내가 떠난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카페를 열어 언젠가 아내가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하고 어린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의 육체에 난 화상 흔적을 끝내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한 번의 실수로 속앓이를 했을 것이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남편을 떠나버린다. 이 부분이야말로 올드한 느낌이었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안 좋은 방식으로 희생했는데 차라리 뉘우치고 돌아오면 좋지 않았을까, 왜 한 마디 소통도 없이 그랬을까, 답답한 느낌이다.
작품 속 중요한 테마는 <노인과 바다>이다. '나'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로 얻은 건설 프로젝트의 브리핑에서 던진 <노인과 바다> 주제. '인간은 파멸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건축에 이식하자는 그의 아이디어는 작품 전반으로 확장된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음울에서 벗어나려고 애써 노력하고 사랑과 안온함, 행복의 상징이던 추쯔와 함께 돈도 잃은 '나'에게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노력이 노인처럼 누군가에게는 패배로 보여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뤄이밍의 벚꽃나무가 시들해져 잘려진 것을 안 날, '나'는 추쯔가 영영 나에게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카페를 접고 떠나기로 한다. 어쩌면 지난 것은 잊고 새로운 행복, 새로운 결실(가을)을 향해 또 '노인'처럼 줄기찬 노력을 다시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기를 바란다.
전체적으로 서정적인 소설이었다. 서사는 '나'의 회상 속에서 이루어지며, 작품 속 주요 모티브인 뤄이밍과 아내와의 사건은 실제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그 주변적인 이야기들과 심리 독백을 통해 짐작하게 하는 구조다.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문학 속의 다소 진부한 소재를 참신한 기법으로 풀어내어 느낌이 독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