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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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완의 사랑> 구성

1편에서 등장한 레오니 고모네 집에 자주 놀러온 파리의 신사 스완의 사랑의 시작과 과정과 사랑이 식기까지를 보여준다. 스완은 사교계의 많은 여인들과 사귀었고, 그 중의 한 여인으로서 오데트를 소개 받는다. 별로 뛰어난 미모가 아닌 오데트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스완을 유혹한다. 당시 화가 페르메르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스완은 어느 날, 그림 속 여인과 오데트가 닮은 것을 발견한 후 점점 오데트에게 빠지지만, 그녀는 그를 점점 막 대한다. 스완의 시새움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그녀에 대한 사랑 또한 식을 줄 모른다. 오데트가 1년간의 장기 항해를 떠나고, 스완은 그녀가 사라지자 평온함을 느낀다. 그러다가 캉브르메르 부인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그녀를 만나러 콩브레에 가면서 내가 왜 몇 해의 인생을 취미도 맞지 않은 한 여인 때문에 괴로워했을까, 라고 생각하며 탄식한다. 
 
<스완의 사랑과 음악>

뱅퇴유의 소악절은 스완에게 사랑의 상징이다. 소악절은 스완의 사랑의 시작과 끝을 알려준다. 처음 들었던 그 악절을 다시 듣기를 원하여 다시 듣는 두 번째, 세 번째 연주가 다르게 들리는 것처럼, 그는 오데트와 처음 가졌던 그 사랑의 느낌을 찾기를 간절히 원하며 계속 사랑을 이어간다. <그래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그러나 생 퇴베르트 부인의 야회에서 뱅퇴유의 소악절을 듣고, 오데트가 마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소악절을 살아있는 존재처럼 감각하고 난 후에야 자신이 그리 바랐던 오데트의 연정이 영영 되살아나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 프루스트는 스완이 음악을 들을 때에 섬세하고, 연약하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실체를 잡아내려고 하면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도 음악을 들으며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음악의 선율을 글로 받아 적으려고 매우 노력했다고 한다.

“멜로디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힘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보편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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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 작가 프루스트 (1871~1922)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 엎드려 글을 끼적대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방으로 들어오려는 밖의 소리는 코르크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가 끝내 튕겨져 되돌아나갔다. 그는 1903년 저명한 의학박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05년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사교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침실의 벽을 코르크로 전부 막았던 것이다. 낮과 밤의 구분이 소용없는 이곳에서 남자는 아침 8시라는 시간에 잠들어 오후 3시라는 시간에 깼다. 그 외의 시간 동안의 대부분을 그는 펜을 잡고 글을 썼다. 글을 쓴 건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술과 문학에 깊은 교양을 갖고 있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9살 무렵 산책길에서 첫 천식 발작을 겪으면서 심약한 그의 최고의 친구는 교양 있는 어머니와 독서가 되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이미지로 그에게 남아있었다. 한 낡은 앨범 속에서, 열 네 살의 그는 이렇게 응답하고 있었다.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엄마와 헤어지는 것>

-<당신이 증오하는 인물은?> 하고 다시 묻자,

-<좋은 것을 좋게 느끼지 못하고, 애정의 따사로움을 모르는 사람>

어머니를 통해서 고전에 대한 기호를 한껏 키워나갔던 그는, 어떤 광경들을 보게 될 때 그것들을 문장의 형태로 노트해 두고 싶다는 욕구를 그때 이미 느끼고 있었다. 훗날, 들판 가운데에서 맴도는 세 개의 종탑이 산책자가 장소를 옮기는 데에 따라서 서로 떨어졌다가는 만나고, 또 서로 겹쳐지기도 하는 광경을 지면 위에 고정시켜 보려고 시도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다 쓰고 난 뒤에 그는 너무도 독특한 어떤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한 감각에 어떤 명료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유로워 질 때, 그 예술의 매력에 의해 작가가 느끼게 되는 그런 행복감이었다. 그는 고등중학에 가서 동인지에 글을 썼고, 숙제로 내준 에세이를 자신만의 스타일 - 산문식의 이음자리도 없이 까다롭게 얽힌 글- 을 썼다. 친구들은 야유했지만, 선생님은 그의 진가를 알아주었다.

1888년 17살이 되던 해에 철학급에 들어갔고, 거기서 그는 칸트학파가 되었다. 그리고 흐리멍덩한 감각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감각의 뜻을 찾아내 표현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의무로 느꼈다. 그는 <즐거움의 나날>이라는 장편을 자비 출판하지만, 그를 부자에 사교계만 드나든다고 생각하던 비평가들로부터 빈축을 산다. 그 후 <장 상퇴유> 장편을 쓰지만 그 소설 또한 실패한다. 1899년 그는 영국의 미학자 존 러스킨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러스킨은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바로 진실이라는 심미관을 발전시킨다. 러스킨의 심미관은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고정된 예술 관념들을 배척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러스킨에게 매료되었고, 그의 미학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미엥의 성경>과 <깨와 백합>이라는 러스킨의 책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장황하게 쓴 존 러스킨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문학에 관해 독립적인 자기 시각을 갖게 된다. 박학, 어원, 고풍스러움을 너무 추구한 나머지 수다스러운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되고, 자신이 내적으로 느끼는 필연적인 것을 적어야 한다고.

“진정한 예술작품은 우리 영혼의 숨은 리듬- 그것은 너무 활력이 넘치는 리듬이므로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 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숨겨진 리듬은 우리의 피의 맥박이 자동적으로 기입되는 심장 박동기의 기록과 매우 흡사하다. ....... (박학을 과시하려고) 작가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큰 작가가 될 수 없다. 생트 뵈브의 경우,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나오는 표현의 일탈은 매력을 지닐지라도 -너무 박학스러움과 고풍스러움을 좇는 태도 때문에- 그의 재능은 이류에 머문다” 고 그는 <깨와 백합>의 서문에 썼다. 그리고 그는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작가의 삶 속에서 찾으려는 생트 뵈브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

“우리 삶의 각 시간들은 죽어가는 즉시 어떤 물질로 된 오브제 속에 육화되고 숨는다. 우리가 그 오브제를 만나지 않으면 그 시간들은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게 된다. 그 오브제를 통해서 우리는 그 시간을 알아보고 부르면, 그 죽은 과거의 시간은 해방된다. -<생트 뵈브를 반박하며> 중에서”

이런 생각을 갖고 쓴 <스완네 집 쪽으로>의 원고가 1912년 6월 완성된다. 그 소설은 그의 일기와 습작노트의 많은 부분에 모티브를 두었으나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게 한 계기는 1909년 어머니가 준 홍차를 마시면서였다. 그는 <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프티트 마들렌 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는 완성된 <스완네 집 쪽으로>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으나, 사교계를 드나드는 그의 전력과 전 작품들의 실패 때문에 전부 거절당하고 다시 자비 출판을 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대문호인 앙드레 지드로부터 출판 거절에 대한 사과 편지를 받는다. 후에 두 개의 출판사가 남자의 책을 출판하기로 한다. 그는 1919년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로 콩쿠르 상을 수상한다. 그는 뒤늦게나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지만,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코르크로 막힌 방에서 글을 썼다.

갑자기 손을 멈춘 남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을 만큼 추운 날씨였으나, 난방이 되지 않은 지 오래였고, 난방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그는 오로지 글에 대한 생각 외에는 하지 않았다. 기침은 자주 났고, 기침을 할 때마다 폐 부근을 부여잡아야 했지만,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입에 대었던 손수건에는 아무렇게나 칠한 새빨간 물감을 접었다 편 듯 그에게서 나온 피가 데칼코마니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했으나, 두렵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간, 그리고 지난날 소유하였던 오브제 속 그 어디엔가 ‘포로’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가, 우리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의 포로가 된 영혼들은 끝내 영원의 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살아낸 지난날이 해방되고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물의 무의미하고 추한 모습을 벗기고 새롭게 보면서 매일 매일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시계는 아침 8시를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순간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잠이 들었다는 생각 없이 잠이 들고, 다시 그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면, 방은 또 한 번의 탄생을 겪을 것이고, 자신은 시절을, 향기를, 심상을 여행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삶은 우리를 끊임없이 옥죄면서 영혼에 상처를 준다. 우리가 사회와의 끈이 한순간 느슨하게 됨을 느낄 때, 부드러움과 명철함을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 노아의 이야기는 가장 비참한 것으로 보였다. 대홍수로 인해 40일 동안 나의 방주 속에 갇혀 있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는 자주 아팠고, 오랫동안 나의 ‘방주’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노아가 닫혀진 방주와 칠흑 같은 땅에 있었다 할지라도, 다른 곳보다 방주를 통해 세상을 더 잘 보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 윌리 해트에게 보낸 편지(1893) 중에서” 



 

<콩브레> 구성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어른이 된 나(현재)는 잠이 드는 생각 없이 잠이 들고,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 하면서 어린 시절의 콩브레를 무의지적 기억(과거)의 단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연히 프티드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다가 어린 시절 콩브레의 모든 것을 떠올리고 다시 잠(현재)에서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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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2
스탕달 지음, 김붕구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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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탕달은 적과 흑의 모티브를 범죄와 수사를 다루는 잡지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그르노블 근처 브랑그에 사는 대장장이의 아들인 앙투안 베르테는 한 신부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한다. 허약한 건강이 이유가 되어 학교에서 나오게 되자 그 20세의 청년은 미슈 가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지만, '무례하게' 미슈 부인에게 접근했다 하여 해고된다. 그는 미슈 부인에게 모욕당했다고 느껴, 브랑그에서 미사중에 그녀를 쏜다. 1828년 2월 23일 그는 처형된다."  

 스탕달은 이 재판 사건으로부터 기본 구조를 취했다. 그래서 크게 보았을 때에는 구성상의 무리가 없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들어가 있기도 해서 가독성이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아마도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과 주제를 넣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과 흑]에는 크게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 정치적 견해 그리고 연애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표면상으로는 연애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 같지만, 줄리앙의 연애를 통해서 작가는 하나의 개인적인 사랑 안에 사회와 정치가 들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레날부인과의 사랑도 그렇지만, 마틸드와의 사랑은 더더욱 그렇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그는 지금은 사회를 상대로 싸우려는 불행한 사람'(P 353)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한계를 처음부터 잘 알고 시작했던 줄리앙의 자기비하, 열등의식은 소설 전반에 퍼져있다.  그는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자유주의자임에도 신분사회에서는 한치도 자유롭지 않은 야심가였다. 당시의 상황이라면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는 소설이 진행되어 가는 내내 수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적과 흑]을 다 읽고 나면, '흑'은 소설 속에 명징하게 잘 버무려져 있으나, '적'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줄리앙은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군인인 '적'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검은 옷의 가정교사와 검은 옷의 사제와 검은 옷의 비서로 밖에 사회에서 존재한다. '적'이 나아가고자 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꿈이라면, '흑'은 명민한 그에게 사회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가정교사가 된 것도 아버지와 레날씨의 결정이었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레날부인과의 관계가 들통나면서이고, 라 몰 후작 비서가 되는 것도 피라르 신부에 주선에 의해서이다. 마틸드 양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녀가 먼저 던지 편지 덕분이고, 레날부인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후작에게 보낸 부인의 편지 때문이다. 작가는 줄리앙을 야심과 욕망 그리고 열등감에 불타 있는 사람으로 그리지만, 그만한 야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비해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그리지는 않고 있다.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지 않는다. 소설 내내 수동적이었던 줄리앙이 딱 한 번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건 바로 '사형'이다. 그런데 야심가인 그가 레날부인을 총으로 쏜 일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야심가인 줄리앙은 언제 야심을 보여줄 것인가, 줄곧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라 몰 후작을 따라 비밀 모임에 암기를 위해 갔을 때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벌어질 줄 알았지만, 그 사건도 거기에서 그쳤다. 내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줄리앙은 여전히 신분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고,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약하다는 것 뿐이었다.)    

한편으론, 야심가임에도 계급의 벽을 넘지 못할 정도의 사회에서라면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부릴 수 있는 야심이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사형'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라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도 스탕달의 [적과 흑]도 사회에서 우대받는 권력, 명예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 안에서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므로 더 아쉽다.  계급사회 안에서 죽음 밖에 답이 없다면, 완전히 다른 방향, 사회가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난 다른 식의 자기만의 야심을 펼쳐보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신분사회라는 것 때문에 야심가 줄리앙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시대의 한계라면, 스탕달이 이렇게 밖에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시대의 한계일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스탕달은 나폴레옹을 정말 좋아하긴 한 모양이다. 그의 말까지 자신의 소설에 변용하여 쓸 정도이니 말이다.

"내 안에는 다른 두 인간이 있다. 머리를 가진 인간과 가슴을 가진 인간" - 나폴레옹

"사실 사람이란 저마다 자기 속에 두 사람이 들어 있지. 대체 그 중의 누가 지금의 나로선 가슴 아프고 꿈 같은 이런 생각을 했더란 말이냐?" 524 - <적과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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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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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력이 좋다. 어떻게 이런 문장까지 썼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문장이 많았다. 첫 구절부터가 인상적이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는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저자는 이 윤리학의 질문을 문학에 접목시킨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라고.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이라고.

제1부의 소설평은 매우 흥미롭다. 세계, 문제, 해결이라는 세 가지 층위로 소설을 평하는 1장 부분은 그 틀에 맞게 해석될 수 있는 소설을 가져왔겠지만 세계를 파악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그리고 해결방안을 제시 혹은 제안하는 과정으로 소설을 분석한 저자만의 시각이 돋보였다. 비판을 해야 할 부분은 비판하고, 칭찬할 부분은 칭찬하면서 거리두기를 하는 비평방식도 젊은 평론가의 패기이자 소신이자 지성으로 느껴져 좋았다.

그 후에 김훈과 올드보이, 무진기행은 굉장히 자주 써먹는 오이디프스, 라깡, 오뒤세우스와 세이렌으로 풀어냈지만,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가 많이 공들여 생각하고, 쓴 글이라는 게 느껴졌다. 특히 무진기행은 김승옥이 정말로 오뒤세우스를 읽은 후에 그렇게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질 정도로 적절하게 분석된 비평이었던 것 같다. 박성원과 김영하, 배수아의 소설 비평은 좀 지루해진다. 문장은 역시 깔끔하고, 날카롭지만, 더 풍부하게 해석해낼 수도 있을 소설을 계속 지젝과 라깡 혹은 정신분석 이론 중심으로 분석해놓아서 오히려 소설을 바라보는 문을 좁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자와 대타자, 닿을 수 없는 욕망 그러나 계속 꿈꾸게 되는 욕망의 에티카는 말은 현란하지만, 자유롭지 못하고, 진부할 때도 있으니까.

제 2부의 시평은 소설평보다 더 풍성하고 재미있고 자유롭다. 저자가 소설보다는 시에 더 애착이 많은 사람일거라고 추측될 정도.(알고보니 그는 시평론가 라고 한다.) 그는 소설을 닿을 수 없는 욕망과 내가 될 수 없는 타인, 그리고 정말로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정체성 등에 초점을 맞추어서 평했으나, 시는 계속 뻗어나갈 수 있고, 아무데나 튈 수 있고, 그 슬픔과 자유와 욕망과 반항이 모두 어우러져 혹은 따로따로 전부 하나의 문학이 될 수 있고, 삶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평한다. 저자는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의 제목처럼 그러한 사고와 생각과 문장과 그리고 날카로운 시각을 이 시평에서 보여준다. 그는 시를 상투와의 전면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서정이 상투적인 것이 되어버린 이제는, 기존의 서정을 뛰어넘은 새로운 서정을 보여야 할 때라고 한다. 단, 그는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를 기다린다. 감각은 야생동물이고, 길들이는 순간에 죽는다. 감각의 본능은 배반이고, 감각은 이중 스파이고, 감각은 이성을 배반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배반한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일은 자신의 언어, 그리고 지금의 ‘나’를 계속 배반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이다.

제3,4,5부는 좀 따분하다. 새로운 시각을 선보이는 곳도 있지만, 기대한 날카로운 분석비평 대신 예리하고 날카로운 호평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평론가의 평론처럼 현란한 말들과 사유를 이용해 말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 아쉽다. 물론 문장은 좋다. 그만큼 치열하게 생각하고 공부한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젊고 능력있는 그는, 조금 더 건방져도 된다. 아니, 건방져야 한다.  현란한 말솜씨의 평론 매너리즘에 빠지는 평론가는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신형철은 자신이 평한 김수영의 시처럼, "젊은 평론가여, 평론에 침을 뱉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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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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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하루 18시간씩을 바치며 이 소설을 써냈다고 한다. 속도를 늦추라는 의사의 권고까지 받았을 정도. 초인적인 힘으로 네 달에 걸쳐 쓴 소설의 초판 1200부는 예고가 나가기도 전에 매진되었다.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파리 묘사와 하숙집 묘사,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워낙 세밀하고 꼼꼼해서 공들여 썼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후부터는 물 흐르듯 리듬을 타고 가독성 있게 읽혔기에 다만, 즐기면서 쓰지 않았을까 그 정도만 생각했을 뿐이다. 역시 강렬한 주제의식과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꾀 부리지 않는 노력은 좋은 작품을 만든다.  

초반부의 시점은 크게 으젠과 작가 두 시점으로 나뉜다.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이야기하거나, 으젠의 시선을 통하여 설명하고, 추측한다. 그러나 점점 갈수록 으젠은 단지 보여주기만을 하는 인물에서 벗어나 보세앙 부인, 레스토 부인, 보트렝, 고리오 영감, 빅토린, 델핀을 연결하는 중심 매듭이자, 서사를 끌고 나가는 중요인물로 부상한다. 그래서 나는 발자크가 왜 제목을 '고리오 영감'으로 지었을까, 궁금했다.  

1834년 9월에 발자크는  "착한 사내(부르주아 하숙에, 600프랑의 은급을 받는)가 둘 다 5만 프랑의 은급을 받는 딸들을 위하여 가진 것 모두를 털리고- 개처럼 죽는다." 라고 사랑하던 한스카 부인에게 작품구상의 편지를 썼다.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어서 모욕을 당해도, 상처를 입어도,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다하지 않는 어떤 감정"을 그리고자 하는데 그 작품의 주인공은 "기독교도로 말하자면 성인이나 순교자에 맞먹을 만큼 아버지 노릇을 하는 한 사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구상 초기부터 작품의 제목이 [고리오 영감]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발자크는 고리오라는 인물을 통해 부성애라는 치열한 정념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 작품을 구상하려고 했던 것 같다.  

"노인은 딸을 초인적 고통이 서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부성애라는 십자가를 멘 예수의 모습을 잘 묘사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미술가들이 인간을 위한 <구세주>의 수난을 묘사하려고 상상해서 그린 그림들 가운데에서 비교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 296 " 

위에 적은 문장처럼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를 나타내는 부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발자크의 의도는 당시 살고 있던 시대상과 파리라는 장소와 맞물리면서 큰 폭발지점을 만들어낸다.  

딸 둘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후 점점 몰락해가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고리오 영감과 출세를 위해서 상류사회에 뛰어드는 인텔리 청년 으젠의 대비를 통해, 막 피어나던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를 필두로 한 계급사회의 허영와 어두움, 그리고 점점 혹은 원래 그러했을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군상(하숙집 사람들 위주로)까지 잡아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세상의 사랑을 뛰어넘은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려는 으젠의 욕망이 대비되고, 검소하다못해 아무것도 없는 고리오 영감의 방과 화려한 살롱이 대비된다.  델핀을 통하여 상류사회를 뛰어드려는 청년 으젠은 고리오 영감을  더 깊게 알게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화려한 살롱 뒷면이 얼마나 추악하고 치사한 세계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보트렝은 중간에 사라지지만 나로 하여금 더욱 되새김질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으젠에게 출세의 더러운 이면을 인식시키면서 그를 그 길로 가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보트렝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만의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고, 벌어지는 상황을 볼 때 반 이상은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보트렝이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으젠을 협박하는 듯하면서도 달래고 설득하는 모습에서 파우스트의 악마를 잠시 떠올렸다. 물론 으젠은 '악마의 계약'을 거부한다. 그러나 보트렝의 말들과, 델핀과 고리오 영감을 통해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된 으젠은   

"세상에는 치사한 범죄만 날뛰는군! 보트랭이 차라리 더 위대해" -349 
 

라고 말하며 고리오 영감에 대한 박애주의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상류사회의 길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보트렝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법으로 스스로 세상을 발견해나간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이 소설은 한 청년의 성장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부밖에 모르던 청년이 돈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파리라는 장소에 와서 하숙집이 아닌 파리의 중앙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껍질을 벗고 진짜 세상과 대결하려는 성장담.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396 

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의 대결은 더 이상 출세나 성공만을 위한 몸부림에서 벗어나 파리로 상징되어 지는 사회, 세상, 나아가 그가 살아낼 삶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뉘싱겐 부인(델핀) 집으로 가는 것으로 막을 내린 작가의 의도를 알 듯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치사한 세상에 조롱을 퍼붓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거나 고리오 영감처럼 어떠한 경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그런 의미에서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 그래서 그리스도에 비견될 만큼이나 숭고했던 인간이 쓸쓸하고 외롭게 죽는 것을 전부 지켜본 으젠은 상류사회로 들어가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을 굳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에 관해 쓰자는 구상으로 [고리오 영감]을 쓰기 시작한 발자크는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심리전개 그리고 언제 읽어도 곱씹게 될 잠언구 문장, 이면을 꿰뚫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으로 이 소설의 지평을 무한히 넓혔다. 정화스님이 말씀하신 '인연장' 그리고 장자에서 읽은 '바람을 타고 나는 대붕'이 생각났다. 어떤 것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길은 리좀처럼 수없이 갈라지고 생성된다. 나는 [고리오 영감]에서 또 하나의 리좀을 발견했고, 좋은 작품은 대개 그렇다는 걸 다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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