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자크는 하루 18시간씩을 바치며 이 소설을 써냈다고 한다. 속도를 늦추라는 의사의 권고까지 받았을 정도. 초인적인 힘으로 네 달에 걸쳐 쓴 소설의 초판 1200부는 예고가 나가기도 전에 매진되었다.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파리 묘사와 하숙집 묘사,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워낙 세밀하고 꼼꼼해서 공들여 썼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후부터는 물 흐르듯 리듬을 타고 가독성 있게 읽혔기에 다만, 즐기면서 쓰지 않았을까 그 정도만 생각했을 뿐이다. 역시 강렬한 주제의식과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꾀 부리지 않는 노력은 좋은 작품을 만든다.  

초반부의 시점은 크게 으젠과 작가 두 시점으로 나뉜다.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이야기하거나, 으젠의 시선을 통하여 설명하고, 추측한다. 그러나 점점 갈수록 으젠은 단지 보여주기만을 하는 인물에서 벗어나 보세앙 부인, 레스토 부인, 보트렝, 고리오 영감, 빅토린, 델핀을 연결하는 중심 매듭이자, 서사를 끌고 나가는 중요인물로 부상한다. 그래서 나는 발자크가 왜 제목을 '고리오 영감'으로 지었을까, 궁금했다.  

1834년 9월에 발자크는  "착한 사내(부르주아 하숙에, 600프랑의 은급을 받는)가 둘 다 5만 프랑의 은급을 받는 딸들을 위하여 가진 것 모두를 털리고- 개처럼 죽는다." 라고 사랑하던 한스카 부인에게 작품구상의 편지를 썼다.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어서 모욕을 당해도, 상처를 입어도,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다하지 않는 어떤 감정"을 그리고자 하는데 그 작품의 주인공은 "기독교도로 말하자면 성인이나 순교자에 맞먹을 만큼 아버지 노릇을 하는 한 사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구상 초기부터 작품의 제목이 [고리오 영감]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발자크는 고리오라는 인물을 통해 부성애라는 치열한 정념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 작품을 구상하려고 했던 것 같다.  

"노인은 딸을 초인적 고통이 서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부성애라는 십자가를 멘 예수의 모습을 잘 묘사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미술가들이 인간을 위한 <구세주>의 수난을 묘사하려고 상상해서 그린 그림들 가운데에서 비교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 296 " 

위에 적은 문장처럼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를 나타내는 부분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발자크의 의도는 당시 살고 있던 시대상과 파리라는 장소와 맞물리면서 큰 폭발지점을 만들어낸다.  

딸 둘을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후 점점 몰락해가는,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고리오 영감과 출세를 위해서 상류사회에 뛰어드는 인텔리 청년 으젠의 대비를 통해, 막 피어나던 자본주의와 부르주아를 필두로 한 계급사회의 허영와 어두움, 그리고 점점 혹은 원래 그러했을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군상(하숙집 사람들 위주로)까지 잡아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세상의 사랑을 뛰어넘은 고리오 영감의 부성애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려는 으젠의 욕망이 대비되고, 검소하다못해 아무것도 없는 고리오 영감의 방과 화려한 살롱이 대비된다.  델핀을 통하여 상류사회를 뛰어드려는 청년 으젠은 고리오 영감을  더 깊게 알게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화려한 살롱 뒷면이 얼마나 추악하고 치사한 세계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보트렝은 중간에 사라지지만 나로 하여금 더욱 되새김질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으젠에게 출세의 더러운 이면을 인식시키면서 그를 그 길로 가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보트렝은 세상에 대해서 자기만의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고, 벌어지는 상황을 볼 때 반 이상은 맞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보트렝이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으젠을 협박하는 듯하면서도 달래고 설득하는 모습에서 파우스트의 악마를 잠시 떠올렸다. 물론 으젠은 '악마의 계약'을 거부한다. 그러나 보트렝의 말들과, 델핀과 고리오 영감을 통해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된 으젠은   

"세상에는 치사한 범죄만 날뛰는군! 보트랭이 차라리 더 위대해" -349 
 

라고 말하며 고리오 영감에 대한 박애주의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상류사회의 길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는 보트렝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법으로 스스로 세상을 발견해나간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이 소설은 한 청년의 성장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부밖에 모르던 청년이 돈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파리라는 장소에 와서 하숙집이 아닌 파리의 중앙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껍질을 벗고 진짜 세상과 대결하려는 성장담.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396 

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의 대결은 더 이상 출세나 성공만을 위한 몸부림에서 벗어나 파리로 상징되어 지는 사회, 세상, 나아가 그가 살아낼 삶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뉘싱겐 부인(델핀) 집으로 가는 것으로 막을 내린 작가의 의도를 알 듯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치사한 세상에 조롱을 퍼붓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거나 고리오 영감처럼 어떠한 경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그런 의미에서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 그래서 그리스도에 비견될 만큼이나 숭고했던 인간이 쓸쓸하고 외롭게 죽는 것을 전부 지켜본 으젠은 상류사회로 들어가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을 굳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에 관해 쓰자는 구상으로 [고리오 영감]을 쓰기 시작한 발자크는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심리전개 그리고 언제 읽어도 곱씹게 될 잠언구 문장, 이면을 꿰뚫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으로 이 소설의 지평을 무한히 넓혔다. 정화스님이 말씀하신 '인연장' 그리고 장자에서 읽은 '바람을 타고 나는 대붕'이 생각났다. 어떤 것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길은 리좀처럼 수없이 갈라지고 생성된다. 나는 [고리오 영감]에서 또 하나의 리좀을 발견했고, 좋은 작품은 대개 그렇다는 걸 다시 발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