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들 이야기 - 틈만 나면 텃밭으로 달려가는
안철환 지음 / 소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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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의 '바람들이 농장'의 교장선생님인 안철환씨의 글이다. 저자는 도서출판 소나무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안산에서 8년째 농부의 길을 걸으며 많은 도시인들을 귀농의 길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몸이 불편하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목발을 의지해야 걸을 수 있다. 그런데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8년째 농사를 짓고 있단다... 왜 이토록 어려운 길을 택하셨을까? 

도시농업은 한때 유행했던 주말농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주말농장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단순한 텃밭체험 수준에 머물며 도시민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농업은 이와 다르다. 일단 목표를 갖고 농사에 임한다. 처음엔 반찬거리, 양념거리를 목표로 그 다음엔 김장거리를 목표로, 최종적으로는 주식인 쌀농사를 목표로 한다. 물론 자신의 생업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쌀농사를 짓는다는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처럼 확고한 목표를 갖고 농사일에 임할 때 단순한 취미나 여가활용을 넘어서 생명살림의 철학을 자신의 삶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다.

저자가 처음에 귀농학교를 만들어 운영할때는 고작 10~20%의 학생들만이 귀농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굶어죽기 딱 좋은 귀농의 현실을 알고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형태의 귀농을 권한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먼저 도시농부가 되어 보라고 한다. 삶을 꾸려가려면 연료라 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한데 오로지 농사 소출만 가지고 자본을 충당하려면 그 인생이 굉장히 팍팍해진다. 나름대로 생명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귀농자의 길을 택했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철학을 맘껏 펴보지도 못한 채 관행농과 유기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엔 농사일을 접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시농부는 자신의 철학을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여기서 경험을 쌓은 후에 최종적으로 귀농을 택해도 늦지는 않다.

내가 고민하고 있던 여러가지 현실적인 어려움들에 대해 잘 짚어준 책이다. 그리고 내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 책이기도 하다. 안철환씨가 아는 건 많은데 비해(?) 워낙 소탈하신 분이다보니 그분의 글에서도 담백한 웃음이 잔뜩 배어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내내 히죽댔다. 특히 말벌과의 싸움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그분의 집요함과 한편으론 잔뜩 겁먹은 표정이 머릿속에 오버랩되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분이 쓰신 좋은 책이다. 귀농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꼭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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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 변화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
강원용 지음 / 현암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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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 서거 일주기를 맞아 지인들이 그간의 수필집을 추려서 다시 엮은 책이다. 이어령씨의 추천사에 의하면 강원용 목사는 비록 개신교 지도자이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국사(國師)로 인식되고 시민사회에서는 사회운동가로 생각되고 여성계에서는 페미니스트로, 환경문제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에콜로지스트로 인식될 만큼 그 활동 영역이 입체적이다. 무려 40여 년 전에 씌인 수필이지만 현대를 사는 나의 고민을 훨씬 뛰어넘는 그분의 필력이 대단해보이고 그분 思考의 깊이와 넓이가 무척 부럽다. 

그분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신만의 튼튼한 견해를 갖고 있다. 다양한 사상가, 철학가, 운동가의 생각에 깊이 침잠한듯 하면서도 그들의 생각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어 자신만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또한 그의 생각의 본류(本流)는 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일차원적인 문자적 해석에 갇혀 있지 않고 성경의 상황과 문맥(Context)을 현실 세계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입체적으로 성경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살리기도 하고 자신의 구원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현대사를 읽으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왜 정통교단에서 인정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선지자들이 이 시대에 훨씬 폭넓은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그랬고 문익환 목사가 그랬고 이 책의 저자인 강원용 목사와 그의 스승이랄 수 있는 김재준 목사가 그렇다. 성서와 현실을 넘나들며 창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불사른 사람들에 대해 왜 보수교단은 삐딱한 색안경을 끼고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가? 

강원용 목사는 사랑의 힘을 믿었다. '제3의 힘'이라는 Chapter에서 세 가지 힘을 언급했다. 그 힘은 사도 바울의 글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희랍적인 지식의 힘은 놀라운 창조의 원천이기만 그 힘의 연장선상에 있는 과학기술의 힘은 인류를 구원하기도 했지만 파멸의 언덕까지 끌고 간 전례가 있다. 또한 표적을 구하는 히브리적인 종교의 힘은 절망과 비극에서 우리를 구원해내는 듯 했지만 표적만을 구하는 종교적 광신은 말이 사람을 끌어가는 꼴이 되어 버렸고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니 요나의 기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라는 예수님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강 목사가 제시한 제 3의 힘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힘은 파괴적인 힘의 한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힘 즉, 사랑의 힘을 일컫는다. 사랑이 없는 교리, 지식, 기적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강목사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을 표현할 '장소'를 제대로 찾는 일이었다. 지식이 서재나 연구실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되듯, 사랑이 교회당에만 머문다면 그리스도의 피흘림은 이 세계에 참된 복음이랄 수 없다. 사랑을 표현할 공간의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지금의 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강목사의 또다른 책인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집어들었다. 이분의 글에는 힘이 있다. 타인의 지식을 얕은 외피로 감싼 수준의 글이 아니다. 또한 이분의 글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별로 없다. 충분히 수긍할 만 하고 더불어 고민해볼 만 하다. 우연히 알게 된 고인의 책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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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1
옥성호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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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읽는 이에게 호기심을 던져주는 책이다.
첫째, 저자가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님의 자제라는 사실
둘째, 그 저자가 최근에서야 기독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셋째, IT 분양에서 일하는 저자가 상당히 폭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사실
넷째, 한국 교계에 만연한 거짓가르침을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상당히 깊게 파헤쳤다는 사실

A.W. 토저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책에도 나와있지만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가르침'은 분명 잘못됐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귀에 들리는 설교,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은 그 참 대상이 하나님에 대한 '앎'이 아닌 인간의 치유, 인간의 성공에 집중하고 있는듯하다. 소위 잘 나가는 대중 설교가의 설교를 들어보면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대중이 가려워하는 부분을 잘 긁어준다는 인식을 받는다. 

참으로 위험한 건,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류의 성공학 법칙과 기독교적인 가르침에서의 성화(聖化)의 단계를 혼용하는 사례이다. 전세계적으로 3천만부 이상 팔리며 성공학 교과서로 자리잡은 맥스웰 몰츠의 '사이코사이버네틱스(우리말역간, 성공의 법칙)'는 환자들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정신적인 성형수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잘 가르쳐주고 있다. 저자도 언급한 나폴레온 힐이나 데일 카네기의 가르침을 통해 내 몸안에 내재된 성공인자를 발굴하여 늘 실패를 맛보며 살던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으로 대역전하는 짜릿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을 대역전시킬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성공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성공학 교사들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이유는 그 가르침을 통해서 한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성공학 교사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떻게 다를까? 성경은 인간이 '자아실현'을 최종 목표로 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대역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작은 예수'가 되라고 가르친다. 즉, 자아를 비우는 단계와 새로워진 신적 자아를 채워넣는 단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심리학에 기반을 둔 성공학은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시각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우주의 에너지를 내것으로 만듦으로써 활력에 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심리학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과 융화될 수 있을까? 저자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반기독교적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심리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라고 말한다.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심리학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대척점에 놓여있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인간을 신적인 위치로 격상시키는 종교라고 매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만 빈센트 필(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조엘 오스틴(긍정의 힘)은 천사를 가장한 어둠의 사도다.

저자가 그토록 부정하는 '기독교 심리학'의 수장격이라 할 수 있는 폴 트루니에의 경우, 자신의 소명이랄 수 있는 상담사역에 심리학적인 기법들을 적절히 활용했다. 저자는 폴 트루니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내가 볼 때 심리학을 반기독교적인 악의 도구로 이해하는 저자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두 개의 꿀단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하다. 말씀의 꿀과 심리학적 성공학의 꿀.... 과연 저자의 말대로 두번째 꿀은 꿀이 아닌 독이라고 판명이 날지, 아니면 두 개의 꿀을 적절히 섞어서 섭취할 필요가 있을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비록 내 생각이 명쾌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세상 가르침에 취해 있는 한국 교회에 약이 되는 쓴소리 역할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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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 미친 재테크를 버리고 명품 투자로 이끄는 절대법칙
이건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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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주가지수가 사상처음으로 2000을 찍었다. 1000을 기점으로 수년간 박스권을 오가더니 불과 몇년사이 무섭게 기세가 올랐다. 그런데 어째 주변에서는 주식으로 돈벌었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코스닥 광풍때의 경험을 학습한 개인들이 막무가내식 몰빵을 자제하기 때문일까??

HTS 개발자로서 주식의 세계에 5년간 몸담으면서 느낀것은? '주식으로 돈벌생각 말자'

흔히들 말한다. 주식은 종목과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그러나 바로 그 타이밍이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주식으로 20~30%의 수익을 올리는 것은 꿈같은 일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초보 투자자일수록 20~30%를 껌으로 본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지인의 소개로 읽은 책이지만 이 책은 금융투자에 있어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특히나 펀드의 위험성 - 저자의 말을 빌자면 펀드 수수료로 돈벌어먹고 사는 '어둠의 세력들'이 던지는 미끼 - 을 신랄하게 까발린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만하다.

적립식 펀드의 성공으로 이제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잡아먹는 직접투자대신 펀드를 이용한 간접투자를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저자는 펀드에 대한 맹신은 무척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펀드에 숨어있는 '보수'라는 무시무시한 함정이 나의 투자자산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때문이다. 펀드는 나 대신 전문가가 주식 또는 채권에 투자를 해주는 것이기에 수고비용(판매보수, 운용보수)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얼마 되지 않는듯한 수고비용이 '복리의 마술'을 제한하는 독이 된다. 복리의 마술은 장기투자에서 빛을 발한다. 그런데 장기투자에서 1~2%의 금리차이는 나중에 원금의 수십배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저자는 단순한 투자, 장기적인 투자를 적극 권한다. 저자 역시 '어둠의 세력'에 몸담고 있었기에 운용이 복잡한 펀드에 이것저것 비용 명목으로 고리의 '보수'를 요구하는 판매회사의 뻔한 장삿속에 멋모르는 투자자들이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게 꽤나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가 추천하는 것은 인덱스 펀드이다. 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 펀드는 운용이 단순하다보니 '보수'가 일반 펀드에 비해 저렴하다. 그가 말하는 성공적인 투자는 그저 시장평균 수익을 좇아가는 것이다. 그 이상을 넘보는 건 탐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인덱스 펀드를 추천한다. 인덱스 펀드는 지수를 따라가도록 설계한 단순한 상품이기 때문에 보수도 일반 펀드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재밌는 것은 미국의 연기금을 관리하는 펀드매니저들의 10년 이상 수익률을 조사해보니 10명중 9명 이상은 시장 평균수익률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연기금을 운용할정도면 투자계의 굉장한 거물일텐데 그러한 거물이 운용한 펀드가 그 지경이란다. 결국 현재는 대부분의 연기금은 인덱스 펀드로 운용중이란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0년 이상 주식에 장기 투자하라
2. 운용 보수가 저렴하고 시장수익률을 따라가는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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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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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무심코 그에 대해 들었을 때는 왜 그가 빠리에서 택시운전사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홍세화씨의 처녀작을 읽게 되었다. 책장을 열자 산뜻한 관광 안내원의 어투로 독자를 빠리 이곳 저곳에 안내한다. 십년을 넘게 택시 운전사로서 빠리를 누빈 경력덕분일까? 그의 안내를 받으며 생전 가보지 못한 빠리의 구석구석을 그와 함께 누빈다. '참 친절하면서도 재미있는 기사양반이군!'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그의 노련한 길 안내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친절한 관광 안내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어투도 바뀐다. 분위기에 한껏 취했던 독자는 이때부터 자세를 고쳐잡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한국에 남아있는 '동지들'이 받는 고통에 비해 자신이 겪는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인은 애써 우기고 있지만 그가 겪은 일들은 한 소심한 사내가 무심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남민전 사건'...
나는 이 사건을 잘 모른다. 바로 이 남민전 사건이 해외 출장차 프랑스에 머물렀던 그가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이유이다. 그게 얼마나 굉장한 사건이었길래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스무해가 넘도록 고국을 등지게 만들었을까? 굳이 남민전 사건이 궁금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약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타인의 비판에 예민하듯이 약점이 많은 사회일수록 한목소리를 내지 않는 세력을 상종못할 죄인으로 취급하는 법이다.  

저자가 프랑스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기 위해 공무원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 뭐랄까 읽는이마저 답답함을 느끼게 만든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왜 망명자가 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한다. 그치만 너무 역부족이다. 그럴수밖에.... 공무원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해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객관적인 정보를 요구하지만 그가 한 행동이라야 고작 서울 시내에서 '삐라'를 뿌린것과 조국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시내에서 불온한 내용의 '삐라'를 뿌리는 일은 기삿거리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망명자로서 남들도 인정할만한 '큰 껀'을 요구하는 공무원과 '큰 껀'이 없음에도 망명 신청을 해야하는 답답한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20년 전이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라고 덮어버릴수만도 없는 문제다. 극한 이념의 대립속에서 소위 빨갱이 잡기놀이가 막을 내린 오늘이라 해서 이 사회의 약점이 치유된 건 아닌것 같다. 얼마전 있었던 송두율 교수 사건을 보더라도 여전히 우리 조국은 '건들면 터지는' 예민한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가 들려주는 빠리의 소소한 얘기들은 책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매일같이 되려 손님에게 길을 묻던 초짜 운전수가 어느덧 베테랑이 되어 빠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습을 보노라면 은근한 웃음이 나온다. '사회와 또 다른 사회의 만남'이라며 그에게 감당못할 호의를 베푼 교수를 비롯하여 택시 운전자로서 만나게 된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단지 낯선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머물게 하기 보다는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고 미처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사회적인 관용과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은 참 따뜻했다. 성품때문이었을까? 한국에 대한 그의 비판, 이민 사회의 한국인에 대한 그의 비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흥분했지만 결국 모든 비판의 마무리는 그다지 매몰차지 않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서러움으로 과격해지지지도 않았다. 같은 비판이지만 박노자씨의 글에서 보이는 냉소는 상대적으로 덜해보였다는 느낌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에 대해 길게 덧붙인다. 끝까지 참고 읽어달라는 그의 부탁대로 '똘레랑스'에 대한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듣노라면,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다수의 대중에게 스며든 지혜와 통찰력이 얼마나 사회를 빛나게 하는지, 얼마나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감싸주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꾹 참고 읽어달라는 그의 부탁을 자못 감사하게 생각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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