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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에 무심코 그에 대해 들었을 때는 왜 그가 빠리에서 택시운전사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홍세화씨의 처녀작을 읽게 되었다. 책장을 열자 산뜻한 관광 안내원의 어투로 독자를 빠리 이곳 저곳에 안내한다. 십년을 넘게 택시 운전사로서 빠리를 누빈 경력덕분일까? 그의 안내를 받으며 생전 가보지 못한 빠리의 구석구석을 그와 함께 누빈다. '참 친절하면서도 재미있는 기사양반이군!'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그의 노련한 길 안내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친절한 관광 안내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어투도 바뀐다. 분위기에 한껏 취했던 독자는 이때부터 자세를 고쳐잡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한국에 남아있는 '동지들'이 받는 고통에 비해 자신이 겪는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인은 애써 우기고 있지만 그가 겪은 일들은 한 소심한 사내가 무심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처럼 보인다.
'남민전 사건'...
나는 이 사건을 잘 모른다. 바로 이 남민전 사건이 해외 출장차 프랑스에 머물렀던 그가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이유이다. 그게 얼마나 굉장한 사건이었길래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스무해가 넘도록 고국을 등지게 만들었을까? 굳이 남민전 사건이 궁금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약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타인의 비판에 예민하듯이 약점이 많은 사회일수록 한목소리를 내지 않는 세력을 상종못할 죄인으로 취급하는 법이다.
저자가 프랑스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기 위해 공무원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면 뭐랄까 읽는이마저 답답함을 느끼게 만든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왜 망명자가 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한다. 그치만 너무 역부족이다. 그럴수밖에.... 공무원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해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객관적인 정보를 요구하지만 그가 한 행동이라야 고작 서울 시내에서 '삐라'를 뿌린것과 조국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시내에서 불온한 내용의 '삐라'를 뿌리는 일은 기삿거리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망명자로서 남들도 인정할만한 '큰 껀'을 요구하는 공무원과 '큰 껀'이 없음에도 망명 신청을 해야하는 답답한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20년 전이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라고 덮어버릴수만도 없는 문제다. 극한 이념의 대립속에서 소위 빨갱이 잡기놀이가 막을 내린 오늘이라 해서 이 사회의 약점이 치유된 건 아닌것 같다. 얼마전 있었던 송두율 교수 사건을 보더라도 여전히 우리 조국은 '건들면 터지는' 예민한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저자가 들려주는 빠리의 소소한 얘기들은 책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매일같이 되려 손님에게 길을 묻던 초짜 운전수가 어느덧 베테랑이 되어 빠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습을 보노라면 은근한 웃음이 나온다. '사회와 또 다른 사회의 만남'이라며 그에게 감당못할 호의를 베푼 교수를 비롯하여 택시 운전자로서 만나게 된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단지 낯선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머물게 하기 보다는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고 미처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사회적인 관용과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그의 시선은 참 따뜻했다. 성품때문이었을까? 한국에 대한 그의 비판, 이민 사회의 한국인에 대한 그의 비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흥분했지만 결국 모든 비판의 마무리는 그다지 매몰차지 않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서러움으로 과격해지지지도 않았다. 같은 비판이지만 박노자씨의 글에서 보이는 냉소는 상대적으로 덜해보였다는 느낌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에 대해 길게 덧붙인다. 끝까지 참고 읽어달라는 그의 부탁대로 '똘레랑스'에 대한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듣노라면,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다수의 대중에게 스며든 지혜와 통찰력이 얼마나 사회를 빛나게 하는지, 얼마나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감싸주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꾹 참고 읽어달라는 그의 부탁을 자못 감사하게 생각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