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진화론 - 세상을 바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됐다
우메다 모치오 지음, 이우광 옮김 / 재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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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이 바뀌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를 연상케하는 인터넷 버블이 '빵!' 소리를 내며 터지고 허황된 신기루에 대한 갈증이 가실 무렵,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웹은 진화를 거듭하며 현실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상계에서 질펀하게 판을 벌이는 기업은 구글, 아마존, 이베이 등... 소위 웹 2.0 시대를 견인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실리콘 밸리와 일본을 넘나들며 컨설턴트, 사외이사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웹의 태동에서부터 버블시대, 버블붕괴시대를 거쳐 '진짜' 웹 기업이 탄생하는 과정을 눈 앞에서 지켜봤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변혁의 시대에는 버블이 존재했다. 전에 없던 신기술이 태동할 때는 성급한 대중의 환호와 열광에 힘입어 주체할 수 없는 버블이 생겨난다. 저자의 말로는 신기술이 도입된 후 그 신기술이 인프라를 형성하는데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버블이 꺼지고 대중의 환호가 한숨으로 변하면서 신기술은 10년의 세월동안 깊이 침잠하며 내적 에너지를 축적한다 . 그리고 대중이 기대했던 새로운 사회는 그 10년의 잉태기간을 거쳐 세상에 나타난다. 철도혁명, 자동차혁명이 그랬고 가장 최근에는 컴퓨터혁명이 그 전철을 밟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시대, 바로 웹혁명이 또다시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저자는 웹혁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몇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바로 인터넷 혁명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혁명적인 요소가 없다. 그런데 무한대로 여겨도 될 만한 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 세상 '저 편'(정보가 통합 관리되는 대형 기업의 정보시스템)에 자신의 관심사와 지식을 저장해놓을 때 그것은 혁명적인 변화로 발전할 수 있있는 기회가 된다. 해당 기업은 신(神)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를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위험성과 가능성이 공존한다.  둘째, cheap혁명이라 할 수 있는 비용절감의 혁명이다. 구글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30만대의 서버를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cheap혁명의 도움이 없었다면 OS와 시스템, 기타 소프트웨어의 비용문제 때문에 구글같은 기업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디스크 용량과 메모리 용량, 그리고 네트워크 트래픽 사용량은 갈수록 그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더불어 OS와 응용소프트웨어조차 '오픈소스'의 물결에 힘입어 거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과거 기업들의 핵심 소스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을 이제는 맘만 먹으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가져올 수 있다.  

웹은 개방의 물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구글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자신의 발 아래서 재편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과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뒀던 가치있는 정보들을 모두 까발린다. 심지어는 세상의 모든 도서관의 자료들을 스캔해서 웹에 공개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핵심 기능조차도 일정부분 오픈한다. 구글맵을 외부에서 제어할 수 있는 API를 개방함으로써 구글맵을 자신의 사업으로 연결시키려는 젊은 기업가들의 욕구를 부채질한다. 이미 미국에서는 구글, 아마존 등의 핵심 인프라를 이용하여 또다른 사업을 추진하는 매쉬업이 성행하고 있다. 웹을 모르는 사람은 찻잔속의 폭풍일 뿐이라고 애써 무시하려들지만 세계는 서서히 구글 등의 웹 2.0 기업에 의해 새롭게 재편되는 경쟁 체제로 돌입해가고 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이익을 올리고 있는 IT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직 웹 2.0 기업 축에 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부분의 수익은 '인터넷의 이쪽편'에서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피스, OS, 개발툴은 MS의 대표적인 캐쉬카우인데 이는 인터넷 혁명과는 무관하게 사용자 PC차원에만 머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제 MS의 시대는 점점 가고 구글의 시대가 온다. 구글은 '인터넷 저쪽편'을 끊임없이 확장해가고 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랄 수 있는 검색, 개인 맞춤형 웹페이지, 심지어는 오피스 툴과 OS까지 MS의 아성을 넘보고 있다. 웹이 진화하면서 시장의 룰이 바꼈기 때문에 자연스런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10년동안 구글의 아성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까? 저자는 조심스레 또다른 빅뱅을 예고하고 있다. 구글은 발상의 방식에서 인터넷의 '저쪽편'에 큰 무게를 뒀지만 여전히 불특정다수에 대한 신뢰면에 있어서는 낙제점이다. 예를 들어 리눅스 개발 프로젝트나 위키피디아의 경우는 불특정다수를 극단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서 Great wisdom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뢰는 웹 2.0 사회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글은 여전히 대중을 극단적으로 신뢰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채용하는 사람들만 봐도 극단적인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 저자는 2가지 팩터 즉, 인터넷 저편에 완전한 무게중심을 두고 불특정 다수를 극단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업계를 재편할 수 있는 제 2의 구글을 기대하고 있다. 그게 진정한 웹 2.0 세상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책을 읽고나니 인터넷의 태동에서부터 웹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잘 요약해놓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진정한 웹 혁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까지 적절히 잘 다뤘다. 기술적인 입장에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여기에 웹 혁명이 갖는 사회과학적인 의미, 역사 발전적인 의미, 인간 심리학적인 의미까지 아우를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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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그리스도
강원용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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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06)에 돌아가신 강원용 목사께서 여든 여덟 되시던 해에 내신 책이다. 88세에 책을 낸다는 것도 특이하거니와 책에서 드러나는 문체와 필력만 봐서는 젊은 개혁주의 신학도의 글처럼 여겨질만큼 신선하다. 나는 강원용 목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며칠 전에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라는 그분의 수상록을 읽어봤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분에 대해 좀더 알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그분의 순탄치 않은 인생에서 중심이 되신 그리스도를 설명한 책이다.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각기 다르게 이해한다. 미국의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와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그리스도는 분명 다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존 칼빈이나 어거스틴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와 칼 바르트 또는 본 회퍼가 이해하는 그리스도는 다르다. 강원용 목사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을 추구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으로 뵙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100%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신학자가 가르쳐준 그리스도가 아닌, 교리가 가르쳐준 그리스도가 아닌, 스스로가 이해하고 깨우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고군분투했다. 비록 지금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의 삶을 지탱했던 유일한 원천은 자연도 아니고 우주의 에너지도 아닌 바로 2000년 전에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강원용 목사는 문익환, 윤동주 등의 걸출한 위인을 배출해 낸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출신이다. 한 장로의 가르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지만 은진중학교의 김재준 교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성경 해석은 평범했고 그에 비해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열심은 차고 넘쳤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걸까?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따르려 했던 소년 강원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인 목마름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답답한 눈꺼풀을 한층 벗겨준 은인이 바로 김재준 목사(당시 교사)였다. 캐나다 유학시절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지 못해 답답해 있을 때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의 교수였던 폴 틸리히의 글에 깊은 감동을 받아 결국엔 틸리히 교수를 사사(師事)했다. 유니언신학대에서 현대 신학의 두 거장인 폴 틸리히와 나인홀드 니버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강원용 목사는 귀국 후에 그가 믿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다.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봐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 세상 가운데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핵심적인 키워드다. 자징 보수주의 교단을 표방하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에 막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강원용 목사는 스스로를 문자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보다 창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 위에 실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수님의 공생에 당시에도 율법적인 해석에 막혀 참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위선적인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던져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원용 목사의 생애에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도전은 강원용 목사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내적 고민과 성찰을 통해 '내가 믿는 그리스도'의 인식을 넓혀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는 그분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하고 실현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왜곡된 현실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채 헤맬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강원용 목사는 성경의 한글자 한글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했다는 '축자영감설'을 강하게 부인한다. 자칫 이런 주장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정통 교단으로부터 배척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원용 목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성서'에 가둬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신적 계시로 말미암은 생명의 책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의 해석에 집착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이해를 토대로 그는 민주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달려가던 한국 사회에 대화의 물꼬를 트고자 노력했다. 온갖 이익집단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심지어는 사회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야 할 교회마저 또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려 할 때에 그는 강력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힘썼다. 이 메시지에 대해서는 추후에 <역사의 언덕에서> 시리즈를 읽고나서 다시 한번 고찰해볼 생각히다. 나는 이제 강원용이라는 거대한 산맥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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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츠! - 미국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파격적 처방과 CEO 허브 켈러허 경영신화, 개정판
케빈 & 재키 프라이버그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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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미국의 저가 항공사 사우스웨스트를 분석한 책이다.

사우스웨스트는 1970년대에 4편의 비행기로 주내(州內) 항공을 처음 시작한 이래로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 기업 문화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보수적인 항공업계에 어떻게 해서 사우스웨스트라는 괴짜 회사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점대점 운항이라든지, 저가항공료 고수라든지, 재미있는 직원들이라든지.. 물론 이 말도 틀리진 않다. 그러나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위대한 항공사는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이 작용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직원들을 가진 회사는 많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겸비한 이들은 찾기 힘들다. 사우스웨스트 성공 이후로 저가정책을 들고 일어선 항공사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잠깐 돌풍을 일으켰을 뿐 그 수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사우스웨스트는 30년이란 세월을 버티면서도 그들의 신선한 벤처정신이 시들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사우스웨스트가 초반기에 돌풍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그 돌풍의 핵심이 '작은 규모'에 있다고 보고 직원수가 5,000명이 넘어서면 회사의 성장기세도 꺾일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를 늘려야만 했다. 10,000명이 되면... 15,000명이 되면... 20,000명이 되면... 그런데 지금은 25,000명이 넘는 직원으로 이뤄진 거대 기업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작은 회사'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경영진의 직원에 대한 사랑, 직원의 경영진에 대한 신뢰, 회사의 고객에 대한 정성,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 직원들의 팀정신, 자발적인 희생, 모든 직원이 행사하는 리더십.... 정말이지 이 회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식어는 끝이 없어보인다. 

나는 사우스웨스트가 기업문화에 만연한 '마키아벨리즘'을 극복했다고 본다. 사람이 모인 조직이라면 어느 곳이나 찾아들기 마련인 관료제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망령을 그들은 유머와 사랑으로 철저히 극복해나가고 있다. 기업이 여우와 같은 수를 쓰는 건 당연지사다. 선행을 하더라도 이기적인 목적이 숨어있고 직원들을 우대하더라도 정말로 직원을 사랑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업의 행위 이면을 늘 의심하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결코 마음을 100% 열지 않는다. 그러나 사우스웨스트는 고객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드는 '진정성'을 갖췄다. 어떤이는 허브 켈러허의 고도의 수작이라고 폄하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와 그가 일관되게 행동하는 바를 보노라면 설령 그게 수작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감동을 준다. 어느 리더가 30년이란 세월동안 일관되게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더란 말인가??? 그것도 희생과 봉사, 신뢰와 같은 퀘퀘묵은 말들을 앞세우며....

콜린 바레트의 말처럼 사우스웨스트는 서비스 회사이다. 단지 그들의 업무 영역이 항공서비스에 연계되어 있을 뿐... 이처럼 자신의 업을 신선한 잣대로 판단하는 회사는 드물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늘상 사업부 회장들에게 자신의 '업'을 확실히 이해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전 직원이 그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우스웨스트는 이러한 면에서 좋은 role model을 제시한듯 하다. 아주 재밌고 신선하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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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
한승오 지음, 김보미 그림 / 강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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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학생운동으로 시간을 보내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은 출판사를 운영해본게 전부인 저자는 나이 사십줄이 되어서야 한번뿐인 인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고 참된 삶을 꾸려보고자 귀농을 선택한다. 귀농 7년차인 농사꾼 한승오씨의 농사일기는 잔잔하면서도 애절하다. 그의 일기를 읽노라면 생명을 틔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숴가며 일하는 농부들의 힘겨운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힘겨움이 종종 귀농을 꿈꾸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부담스레 여겨지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환상에서 깨어나 냉혹한 현실을 바라보도록 도움은 주는 면도 크다. 모종이 벼가 되기 위해서는 아늑했던 보금자리를 떠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가운 땅바닥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적당한 때에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모판에서 웃자란 모들은 그 뿌리가 얕기 때문에 비바람에 쉬이 쓰러진다. 하지만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은 벼는 웬만한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모판에서 땅으로 옮겨심어진 벼들은 몸살을 앓는다. 새로운 야생의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썩 자연스럽지 않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환경, 특히 아늑했던 보금자리를 떠나 거친 세상을 맞보려는 자들에게는 몸살이 뒤따른다. 우리 집도 몸살을 앓는 중이다. 편안했던 보금자리(아파트)를 떠나 산 밑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도 이미 예견했던 일이긴 하지만 막상 터를 옮겨보니 직접 체감하는 어려움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 그러나 이런 몸살을 한차례 앓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각, 나를 보는 시각이 분명 달라질 거라 믿는다. 변화는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우리는 자연스런 연결을 꿈꾸지만 실상은 단절의 아픔을 필요로 한다. 그런 단절이 무서워서 변화를 애써 외면하기만 한다면 그 인생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웃자란 벼마냥 외부 환경의 세파에 정신없이 흔들릴 것이다.

가족의 얘기가 거의 없어서 못내 아쉽다. 이제사 스무마지기(4000평)를 혼자서 농사짓는 중견 농부로 변한 저자의 뒤편에서는 분명 쓰리고 아픈 가족의 이야기들이 즐비할거라 생각되는데 그 이야기가 쏙 빠져있어 아쉽다.

늦깍이 농사꾼이지만 우직하게 자신의 철학을 지켜나가는 저자가 대단해보였다. 트랙터로 하면 몇시간이면 끝낼 땅갈기 작업을 우직하게 경운기로 며칠간 돌리는 모습을 보면, 건조기로 짧은 시간 안에 말리면 될 쌀을 고집스럽게도 때 맞추기도 어려운 햇볕에 말리는 모습을 보면, 제초제 몇 통이면 해결될 일을 마다하고 질게 뻔한 잡초와의 전쟁을 마다않는 모습을 보면 생명을 아끼고 자연을 존중하고 인간미를 잃지 않는 저자의 생각에 경외감이 들 정도다. 이런 농부들의 이야기가 있기에 나같은 어리숙한 사람들이 '질게 뻔한 생존싸움'의 터로 찾아들어갈 꿈을 꾸게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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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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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내가 아무리 독립적인 사고를 하고 싶다 하여도 내가 속한 문화, 내가 쓰는 언어,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 흘러 나오는 의식의 체제를 완벽하게 벗어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한 차이는 주로 타 문화권, 타 언어권에서 두드러진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니스벳 교수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큰 범주 내에서 각기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이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 꼼꼼히 연구했다.

서양으로 대표되는 곳은 고대 그리스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좋아한 그리스 사람들은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성경을 읽어봐도 바울이 고린도(korinthos)에 갔을 때 이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해안도시라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인지 이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생각과 비교하며 검증하여 벼리는 작업에 충실한 탓에 논리학이 태동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 갖춰졌다. 서구의 사상은 전체를 아우르기에 앞서 부분을 세밀히 논하며 이를 나름의 범주로 체계화하여 독특한 규칙성을 찾아왔다. 때문이 이러한 토양 아래서 과학 문명이 발현할 수 있었고 내용을 뛰어넘는 형식논리의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동양으로 대표되는 곳은 중국이다. 이 문화권은 인(仁)과 화(和)를 중요시하기에 애초부터 극렬한 논쟁이 자리잡을 토양은 아니었다. 사람 개인의 권리보다도 공동체의 조화를 우선시했기에 설령 의견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금새 중립적인 자리를 확보하는 '중용'의 도가 사회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자기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세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겼던 서양사람들에 비해 동양인이 바라본 세상은 오묘하고 신묘해서 인간의 지혜로는 충분히 깨달을 수 없는 곳으로 여겼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순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밸 수 있었고 눈 앞의 좋고 싫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지도 교수로서 저자는 동양인들이 머리는 좋지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일에는 무척 서툴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생각의 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시선이 이처럼 다르다면 자신의 문화를 앞세우는 문화우월주의자의 주장은 그 논거를 잃어버린 셈이다.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 사회가 과학 문명의 사회이고 사회적인 계약이 우선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서양인의 관점에서 볼 때 좀더 쉽게 세상을 이해하고 좀더 쉽게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동, 서양의 차이에 대해 다뤘지만 같은 문화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이 지닌 생각의 지도는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본다면 타인의 세계를 용납하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 남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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