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천규석 / 실천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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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부터 써야 할 지 모르겠다.

여기 저기서 자주 참조되던 천규석를 자신의 책을 통해 이렇게 직접 대하고 보니 이 분의 올곧은 철학이 무거운 돌덩어리처럼 내 어깨를 짓누른다. 이 분은 원칙주의자다. 한 치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견고하게 세워놓은 생명에 대한 철학, 자연에 대한 철학, 삶에 대한 철학이 삶 가운데 진실되게 어우러져서 사소한 거짓조차, 눈에 띄지 않는 부조리조차 서슬처럼 끄집어낸다. 그의 생각과 이상은 높디 높다. 그러나 그가 겪은 현실, 그가 처한 현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힌 현실은 시궁창과도 같다. 그래서 그 간격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문득 그가 불쌍해보인다. 그리고 마음 한 켠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비단 나만의 감상일까?  

그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소농 두레'이다. 소농이 살아야 땅이 살고 땅이 살아야 농촌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소농이 농사를 지어야 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두레 조직을 구현해야만이 공동체가 건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넓디 넓은 땅을 경작할 소농을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귀농학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배출되는 젊은이들이래봤자 소수에 불과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결국 그는 한살림 공동체에서 마련해준 자본금을 토대로 8천여 평의 두레답(畓)을 마련하여 젊은 귀농인 몇몇과 함께 자신의 철학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요즘 내가 가장 궁금증을 품고 있는 '태평농'의 개척자인 이영문씨와의 만남이 책에 소개되어 있어 깜짝 놀랬다. <녹색평론>의 주선으로 한창 화제가 되고 있던 태평농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천규석씨가 경남 하동군 옥종면으로 급파되었다. 혼자서 3만 5천평을 짓던 이영문씨는 자신이 개발한 태평농을 쓴다면 혼자서라도 수만, 수십만 평도 농사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태평농의 핵심은 최대한 생태계를 보존함으로써 자연 스스로가 농사를 짓도록 하는 데 있다. 잡초와 해충이 벼에 큰 영향을 주지 않도록 적절한 관리만 해주면 된다. 잡초제거는 수확기에 전 작물의 줄기를 그대로 땅에 피복함으로써 잡초의 생육을 제지하는 데 있고 해충의 방제는 익충이 살만한 환경을 조성해서 천적관계로 방제를 하는데 있다. 태평농의 효과와 실태를 확인한 천규석씨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태평농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나는 기계의 사용이다. 추수와 동시에 파종을 해야하기 때문에 콤바인과 파종기(이영문씨가 개발)를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한다. 기술 및 자본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기계의 사용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이다. 두번째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태평농이 보편화되면 자신이 주창한 소농 두레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4천평의 소규모 논에서 가족 단위로 농사짓고 이러한 소농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태평농은 어쩌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농법이다. 이영문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소농두레에 대한 그의 고집은 집착으로 비칠만큼 대단하다. 또한 그는 농사의 지역성, 자립성을 추구하는 그는 세상을 모순덩어리로 이해한다. 물건너 온 농산품은 그 경작 과정과 수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태 파괴적인 요인때문에 단호히 거부한다. 또한 소농을 죽이는 농정(農政)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가 제시하는 방법 또한 대담하다. 땅이 필요한 농부가 땅을 살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타개하는 차원에서 농업은행-현재의 농협과는 다른-을 만들어 정부예산으로 땅을 일괄 구매하여 귀농지원자들에게 장기로 무상대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눈 먼 돈처럼 흩뿌려진 42조원의 행방을 추적하다보면 오히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이 훨씬 현실적이고 농부를 위하는 길처럼 여겨진다.  

저자가 지향하는 바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땅과 농사를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는 올곧은 학자요 농부의 말에 농정당국이 조금의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땅의 파괴된 농촌 마을이 다시금 되살아나지 않을까? 까탈스런 원칙주의자의 길이 무척이나 험난해보였지만 이런 인물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의 사상과 철학을 실현할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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