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하나님의 사람 4
에버하르트 베트게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본회퍼는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나는 현장의 한 가운데에서 고심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수상이 됨으로써 피의 역사는 시작됐다. 루터라는 인물을 배출한 종교개혁의 나라에서, 교회는 히틀러 정권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독일 기독 신자들'이라 불리는 압도적 다수의 독일 그리스도인은 히틀러를 환영했고 히틀러의 생일에는 충성서약을 맹세하기까지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회퍼를 위시한 소수의 '고백교회' 형제들은 정신나간 기관차의 폭주(히틀러)를 막기 위해 현 정권에 대립의 각을 세웠다. 

히틀러의 공약은 '독일 기독 신자들'과 쉽게 영합했다. 아리안 조항(아리안 인종이 아닌 사람, 즉 유대인의 공직 취임을 금지한 법안)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탄압한 장본인이 유대인이라면 유대인을 말살하려 시도한 무리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 것을 촉구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대중의 욕심 앞에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본 회퍼는 아리안 조항을 거부했고 더 나아가서는 히틀러가 주동하는 전쟁의 참여를 거부했다. 즉, 본 회퍼는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인권 문제를 다뤘을 뿐 아니라,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광야에서 외로이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는 당연히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는 고백교회마저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고백교회 형제단들은 병영과 참호 속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카드를 보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전쟁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정부의 일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훌륭한 군인이 되어라"

본 회퍼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소수의 장성들과 결탁하여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무위에 그쳤고 회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히틀러가 자살하기 20일 전인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서른 아홉의 길지 않은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사상은 여실히 남아 교회가 먹고 자라야 할 자양분을 충분히 제공해줬다.

회퍼의 신학적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는 종교개혁이 내건 복음서의 구호 "나를 위하여"(pro me)를 "우리를 위하여"(pro nobis)라는 복수형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를 "타자를 위하여"(pro aliis)로 이해할 것을 촉구했다. (p. 243)

어쩌면 이 짧은 대답이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본 회퍼의 결론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까지도 그는 포용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이와 확연히 대비된다. 우리의 질문은 여전히 "나를 위하여"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우리를 위하여" 산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살 따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려 고난을 무릅쓰고 세상의 중심에 오셨건만 하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 무리들은 감히 세상의 중심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 뿐 하나님의 고난을 몸소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본 회퍼는 우리 안에 있는 '종교성'을 강렬하게 비난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껍질에 얽매여 세상을 향해 화해의 메시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회퍼는 교회가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값싼 은혜'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없이 무하정 쏟아 내는 은혜이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p. 231)

루터가 은혜에 대해 말할 때면, 그것은 그 자신의 삶이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루터는 은혜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 말을 똑같이 되풀이하지만, 다른 점은 그들이 루터가 늘 자명하게 생각했던 것을 빠뜨리고, 그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가 자명하게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닌 순종이었다. (p. 233)


본회퍼에 관한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여태껏 그가 주장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단지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라는 단어만 어디서 주워들었을 따름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그와 동일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게 됐다. "그리스도는 오늘의 나에게 누구인가?" 얼마전에 읽었던 강원용 목사의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이쪽으로 갈 수도 있고 혹은 저쪽으로 갈 수도 있다. 공허한 철학적 질문이 아닌, 역사 속에,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해 이 질문을 무겁게 던져 본다. "그리스도는 오늘의 나에게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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