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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평점 :
5.0
먼저 하나는 인정하자.
난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렇지 않은 척 해도 표정이 다르겠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도 내겐 평가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상 최초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는 대대적인 수식어가 없었어도 분명히 읽었을 책이니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의 팬이니까.
피아노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로, 11년의 취재와 7년 간의 시간을 들여 완성되어 첫 구상부터 총 12년이 지나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책은 3년마다 열리는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부터 본선까지, 그 모든 순간을 빠짐없이 보여주겠다는 듯 700여 페이지를 할애하여 오롯이 선사한다.
진, 아야, 마사루, 아카시, 네 명의 연주를 중심으로 콩쿠르는 진행되는데 그건 이들이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실제 콩쿠르에서 모든 참가자 중 뛰어난 몇 명만 기억에 남는 것처럼 그저 그들의 실력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콩쿠르 후반으로 갈수록 실력자들이 많아지니 남은 페이지가 분명 앞보다 훨씬 적은데도 다른 이들의 연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불과 일주일 정도의, 딱 하나의 콩쿠르만 보여주었을 뿐인데 이렇게도 지독히 그들과 함께 가게 만든다.
음악을 글로 나타낸 거고 심지어 모르는 곡인데 그들이 그 곡을 통해 도달한 지점이 눈에 보여 버리니까 이상하다.
그러니까 꼭 수박을 모르던 내가 수박우유를 맛본 기분.
결국은 그 음악을 찾아 들으며 함께 하지 않는다면 결코 수박에 대해선 알 수 없겠지.
피아노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피아노의 숲`과 `4월은 너의 거짓말`이 떠오른다.
특히 `4월은 너의 거짓말`은 내가 처음 접한 피아노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라 처음 소개글을 접했을 때부터 생각이 났다.
이 책은 심지어 그림도 존재하지 않는 글인데 어떻게 이렇게 선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보여주는 곳으로 끌려가면서 결국 음악은 글이고 말이며 장면이고 느낌이란 걸 안다.
서로에게 자극받으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천재들의 경쟁, 좋은 영향만을 남기는 싸움이라니 그야말로 모순이지만 오로지 아름답게만 표현된 이유는 알 것 같다.
경쟁의 치열함이 주제였다면 아마 훨씬 짧고 훨씬 강렬했을 거다.
이처럼 시간을 들여 서서히 내어놓는 연주가 아니라 어쩌면 계산적인 연주들이 중간 중간 흐름을 깨어 놓았겠지.
성장을 연상하는 배경들과 티끌만큼도 없는 나쁜 시선이 한없이 이상적인 따뜻함을 자아낸다.
애초에 피아노 선율은 아름다우니까 그쪽이 훨씬 좋다.
책의 원제는 <꿀벌과 원뢰>였다.
원뢰는 사전에 따르면 멀리서 울리는 우레인데 천둥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단어다.
아마 의미가 바로 통하지 않아 천둥으로 대체했을 것 같다.
태클걸고 싶지 않을 만큼 훌륭한 번역이었으니까.
꿀벌은 꿀벌왕자인 진을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책의 시작과 끝에 나왔던 음악의 시초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닐까.
음악의 근본이 되는 소리, 음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 같은.
그렇다면 원뢰는 음악의 무엇일까.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우레와 같은 박수일 수도 있고 곧 다가올 태풍을 예고하는 전조일 수도.
책에는 총 3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아카시 같은 범재도 주요 인물이긴 하지만 3명은 역시 많아 보이긴 한다.
하물며 셋이 서로를 견제하며 대립하는 구도도 아니다.
때에 따라 두명씩 짝지어지는 셋은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
꿈을 향해 나아가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서로를 친구로 여기며 함께 어우러진다.
그럼에도 확실히 3이란 숫자는 딱 떨어지지 않아서 그 중에서도 더 나은 천재를 찾게 되고 한 명을 소외시킨다.
다 천재인데 말이다.
천재하면 흔히 따라오는 열등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책은 드물다.
이 책은 그보다는 천재들 만의 이해와 대화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재능에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천재지만 알지 못하는 것도 있고, 방황하기도 하고, 뒤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천재이기에 음악을 밖으로 꺼내오고, 완벽히 부활하고, 거창한 꿈을 꾼다.
결국 그 다채로운 향연이 이렇게 총 천연색의 책을 만들어낸다.
클래식은 즐겨 듣진 않지만 좋아하는 편이라 가끔 찾아 듣는다.
유명한 음악가의 유명한 곡 이외에는 잘 모르지만 조성진 앨범은 소장하는 정도다.
그냥 피아노 콩쿠르와 온다 리쿠라는 조합으로도 충분했는데 수상 소식부터 이 책은 참 과한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입한 지도 벌써 몇 주나 지났지만 제일 맛있는 건 제일 마지막에 먹는 버릇이 자꾸 읽는 시기를 미루게 만들었다.
더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불쑥 계절이 바뀌기 전에, 그러니까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우니까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가도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 내려가고 싶기도 했다.
손에서 놓기 싫었다.
또 읽게 될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비하인드 스토리나 속편을 기대하는 마음과는 달리 그저 이 책의 내용이, 이 콩쿠르의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역시 온다 리쿠는 좋구나.
사실 이렇게까지 따뜻한 분위기일 줄은 몰랐는데 연극을 향한 애정이 보였던 `초콜릿 코스모스`처럼 피아노를 애정한다는 느낌이 여실히 드러나는 책이었다.
분명 좋아하지 않으면 이 정도까지의 책은 나올 수 없다.
꼭 그 연주장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여운은 감돌지만 분명히 듣지 못했다는 건 아쉽다.
같은 곡을 재생하더라도 그들이 연주한 곡은, 그 모든 장면을 보여 줄 음악은 아니겠지.
언젠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려나.
그럼 그와 비슷한 걸 혹시 들을 수 있을 지도.
아무튼 좋다, 좋아.
마음껏 좋아해야지.
또 다른 책은 나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