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강은 죽음이고, 가트는 죽음이며, 환한 색깔 사리를 입고 환히 빛나는 가트의 여자들도 죽음이고, 로인클로스를 두른 가트의 남자들도 죽음이다. 하지만 갠지스강이 극상의 죽음이다.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이 하수의 현신, 수천 년 동안 끝없이 거품을 내며 흐르는 오물, 그의 유일한 기회라고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뿐이다.
인력거를 부를 수는 없다. 택시를 잡을 수도 없다. 기차를 탈 수도 없다. 유일무이한 방향이 만약에 존재한다면,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나아갈 때만 그나마 희망의 빛이 있으리라. 어디로 어떻게 갈지를 미리 생각해놓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다, 그의 유일한 기회는 가능한 탈출 방식이 뭔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공포에 몸을맡기는 것뿐이다.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공포는 넘치니까.
그가 여기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가 바라나시에 도착해서 첫 번째로 가트에 눈을 두었을 때, 갠지스강에 눈을 두었을 때, 그는 여기로 여행 오지 않았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사실상 인도에 오겠다는 계획 자체는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이었다. 사실상 그는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코 원치 않았어. 나는, 하지만 나는 해야 하고 할 수 있을 때 안 된다는 말을 못했을 뿐이었어. - P304
이 작품집의 1부는 서사가 있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관찰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고, 역사가들이 정해놓은 인위적인 마디 없이 흘러가는 역사처럼 문장도 그렇게 흘러간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길을 잃고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헤매듯이, 문장도 출구를 찾지 않고 그와 함께 질주한다. 결국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침표를 만날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의 삶도 곧 다가올 종말에 이르러서야 마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종말의 감각 속의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행동은 결국 모여서 파국에 닿겠지만, 그 시간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것은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아무리 늦어도, 토리노에서는>에서 나오듯이 무효할지 모르는 도덕법칙에 대한 인식이다.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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