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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그제는 회식이 있었다. 미리 예정되지 않은 회식이었다. 오후 한 시경 통보 받았다. 오늘까지 반드시 예산이 집행되어야 해서. 회식의 이유였다. 눈치를 쓱 보더니 한 명이 선수를 쳤다. 감기에 걸렸단다. 너무한다 싶다. 나는 목디스크로 얼마 전까지 병가인 상태였다. 그러나 별 수 없다. 세 명인 부서에서 두 명이나 빠질 수는 없다.
가까운 자장면 집에서 모였다. 메뉴판은 장님만 본다. 유린기 하나와 가지밥, 그리고 흰 짬뽕. 자장면 집에선 자장면을 먹어야지. 젠장. 장님은 하실 말씀이 너무너무 많다. 다른 사람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자신은 된다고. 어쩌겠냐고 하신다. 아, 예. 모두들 웃으면서 끄덕거린다. 나도 웃었고, 웃는 내가 싫었다. 옆 자리 동료에게 문자로 톡톡 '집에 가고 싶어.' 했다. '나도. 나 다시 가서 일해야해.' 답장이 왔다. 작은 반항이었다.
화제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으로 이어졌다. 잠시 장님의 눈을 피해 우리끼리 속삭였다. 취업 절차를 거친 사람과 몇 년 근속한 비정규직이 같은 자격을 가질 수 있는가, 왜 같은 자격과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가를 이야기했다. 왜 안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노조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슈이다. 노조에서도 비정규직은 설 자리가 좁다.
언니와 네 살 터울이다. 초등학생 시절 집을 지키고 있으면 오후 늦게 학교를 마친 언니가 집으로 왔다. 언니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현관문 고리를 잡아 세게 흔드는 것으로 나를 불러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뛰쳐 나가 문을 열어야 했다. 늦게 열면 타박이 이어졌다. 아직도 현관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긴장한다. 평소에도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어느 날은 학교 음악책이 보이질 않았다.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그 해는 음악책이 없이 지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이삿짐을 싸면서 언니 옷장 서랍 밑에 깔려 있는 내 음악책을 찾았다. 반으로 찢긴 상태였다. 콜라를 사오라는 언니에게 싫다고 얘기한 다음 날부터 음악책이 사라졌다. 싫다는 나에게 안 사오면 음악책을 찢겠노라 엄포를 놨으니 책을 찢은 이는 언니였을 것이다. 그때 언니는 집에 있었고(물론 집 앞에는 슈퍼가 있었다.) 나는 집에서부터 걸어서 30분 떨어진 엄마 가게에 있었다. 언니는 집 앞 슈퍼에 가기 귀찮아서 나에게 30분을 걸어 콜라를 사오기를 요구했던 것이고 거부한 벌로 음악책까지 찢어버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심장이 쿵쿵 뛴다.
중학생 때였다. 엄마 가게가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금융위기의 여파였다. 수업을 듣고 있던 나를 행정실 직원이 불러서 행정실로 따라갔다. 수업료를 납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집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아빠가 전화를 받았고, 이미 수업료를 납입했다고 행정실 직원에게 말했다. 확인 절차가 끝나고 나는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료를 못 낸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행정실에 서 있었다.
첫 직장에서의 일이다. 그해 6월 나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1월 단체로 동원되는 업무에서 열외하고자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받아든 부장은 나에게 말했다. '일상 업무는 하면서 이 업무는 못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군소리 못하고 '네'하고 물러섰다. 그것은 그 부장의 생각이었다.
살면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나를 대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가난하지만 현명하게 살아온 엄마, 내 감정을 존중해줬던 아빠, 나를 인정해준 선생님, 나의 부족함을 감싸안아 준 친구들.
나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를 상대한 콜센터 직원들을 만나라고 하면 나는 도망쳐 버릴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 존재하던 그들에게 나는 화풀이를 해댔다. 실컷 한 다음에는 '그게 직원분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하고 내 죄의식까지 덜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마치 내가 갑인 것처럼 착각했다.
요즘 읽은 책들은 공통적으로 주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는 전문가에게 모든 걸 맡기지 말고 능동적인 경제 주체가 되기를, 채사장의 열한 계단에서는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기를, 그리고 이 책에서는 사유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장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를 이용해 먹을 궁리만 하는 것 같은 언니에게는 어떻게 대할까. 어떻게 하면 오랜 대기 시간과 성에 안 차는 콜센터 직원에게 화내고 싶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는 천박하지 않게 살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