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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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연암의 곁에 조용히 서서 잠시 삶을 엿보았다. 큰누님의 상여를 떠나보낼 때 함께 강가에 서 있었다. 석치의 장례에도 따라갔다. 백동수와 집터를 볼 때 나도 거기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고 박희병 선생님과 함께였다. 내가 연암의 곁에 멀뚱히 서 있으면 박희병 선생님이 조곤조곤 뒷 얘기를 설명해 주었다. 문득 책에서 고개를 들어 거실을 바라볼 때 현실로 돌아오는데, 현실이 오히려 꿈 같았다. 이 책을 통해 연암의 곁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책은 연암의 산문과 저자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지명, 편지, 제문, 책의 서문, 집이나 사람에 관한 기문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이 실려 있다. 연암의 글은 내용이 절묘하고 섬세하다. 구성은 기발하고 사람을 끌어 당긴다. 마음은 슬프고 분하다.

연암의 글에는 '루저'들이 나온다.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 평생 아등바등 온갖 고생을 다한 이름 없는 여성들(양반전이나 허생전에서 양반의 아내가 양반에게 쓴소리를 하는 장면이 괜히 나온 건 아닌가보다.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나라를 경영할 능력을 갖췄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작은 고을에서 서류나 정리한 선비들, 멋과 풍류를 아는 낭만 협객이었지만 늙고 병들어 장애를 갖게 된 사내. 처지가 서글프고 세상에 화가 나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갑갑한 상황에 처한 이들. 연암도 이들 중 하나이다. 분하고 갑갑한 마음에 루저들은 홧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밤길을 쏘다니기도 한다. 시골로 들어가거나 기행을 일삼는 이들도 있다.

분하고 답답한데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분하다. 답답하다. 그래서 김 첨지는 아내를 때렸고 베르테르는 총을 들었다. 연암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선비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분하고 답답할수록 선비답게. 지위가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인간답게 사는 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거나 책 너머 사람과 세상을 읽고 쓰는 법에 관해 고심한다.

연암의 삶을 엿보며 가장 반성했던 것은 '관계'를 맺는 방법이다. 연암은 관계를 허투루하지 않는다. 큰누님, 형수, 친구, 제자의 삶을 통찰하고 연민한다. 글과 세상의 관계 역시 대강 넘기는 법이 없다. 천천히 생각하고 뜻을 구한다. 나는 어떤가. 대강대강 빨리빨리. 임기응변으로 살고 있지 않나. 책도 설렁설렁 대화도 설렁설렁. 뭐 하나 진득하게 들여다 보거나 귀 기울이지 않는다. 매일 피곤하고 정신 없이 살 뿐이다. 이렇게 살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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