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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얼마 전 읽은 서은국의 ‘행복의 기원’은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진화학의 기본 전제는 생물은 생존하고 번식하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특정한 행위를 하는 개체가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기면 그 개체의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특정한 행위를 하지 않은 개체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그 개체의 유전자는 도태된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개체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 해당 행위를 반복한다. 이때 ‘쾌감’이 행복이다. 맛있는 걸 먹는다-쾌감을 느낀다-쾌감은 금방 소멸한다-그럼 쾌감을 느끼기 위해 또 먹는다-쾌감을 느낀다-.... 가 반복되면서 개체는 살아남는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 행복을 느끼는 개체가 행위를 반복할 확률이 높고, 결과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 그럼 어떤 행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까?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걸 먹어라.
오송에 몇 주 살아보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그저 인간은 모여야 힘을 발휘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인 줄 알았었다. 그게 아니다. 사람은 모이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모이는 걸 좋아하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가 있는데 모이는 걸 좋아하는 개체가 사회를 만들었고 사회를 만든 개체가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다는 뜻이었다. 평생동안 사람 북적이는 건 딱 질색이고 사람 만나면 피곤하기만 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아니다, 아니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가고 싶다. 꼭 북적이는 곳에 당장 가지 않더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싶다. 오송에 오면서 제일 아쉽다고 생각하는 건, 그러니까 분당에 살면서 제일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 집 앞에 있는 2001 아울렛이다. 특별히 자주 가서 물건을 사진 않았는데 그래도 심심한 토요일이면 2001 아울렛이나 갈까하고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어디서 살 것인가’ 역시 비슷한 생각이 펼쳐진다. 사람은 자연과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야 행복하다. 자박자박 10분 걸어서 공원에 가서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해야 좋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와와와와 뛰어놀거나 나무 아래에서 책도 읽고 수다도 떨고 해야 좋다. 상가 건물도 계단을 개방해서 거리와 연결되면 좋다. 이 책의 큰 테마는 ‘연결’이다.
책을 읽고 분당집의 행복 요소를 찾아보았다.
1. 탄천
2. 2001 아울렛
3. 산, 나무
4. 까치
5. 구미도서관
6. 분리수거를 수시로 할 수 있다.
7. 나비스시
8. 동네 고양이
9. 투썸 플레이스
그래, 여지껏 몰랐지만 나는 사람이 모이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었어!
저자는 맺는 글에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코르뷔지에를 비교한다. 프랭크 로이드는 주변 환경과의 맥락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집을 지었고,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 요소를 적극 활용해서 어디에나 지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집을 지었다.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의 건축이 사용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프랭크 로이드 스타일의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건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단지 건축비의 문제가 아니다. 아파트를 사야 나중에 팔 때 시세 차익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 개성이 강한 주택은 매매도 어렵고 시세 차익도 기대하기 어렵다.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60%가 아파트에 산다는데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아파트는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솔직히 주택 청약을 신청할 때 저자가 강조하는 삶의 맥락은 물론 내부 인테리어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를 것인지만 생각한다. 일전에 남편과 과천 아파트의 견본주택을 보러 갔을 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내부가 어떻든 청약 넣을 거잖아. 내가 산 집값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다른 아파트 집값이 어떻든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집값은 상대적이다. 이사를 갈 때 살고 있는 집을 팔아도 다른 집을 살 수 없다면 너무너무 곤란하다.
그래서, 어디서 살 것인가. 프랭크 로이드의 집이 좋다는 건 알아도 아마 내가 다음에 고를 집 역시 르 코르뷔지에의 집일 것이다. 오늘 시립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로비 한 켠에서 책을 읽다 도서관을 둘러봤다. 내가 앉은 자리 옆에 사람 키보다 약간 작은 나무 모형이 있었다. 가지마다 쪽지가 달려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가족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소감이나 개인적인 소망이 적혀 있었다. 임용고시 합격, 엄마 사랑해요, 건강한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 등. 가장 눈여겨 본 메시지는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의 글이었다. ‘아빠와 하루를 보내서 즐거웠다’ 아빠와 뭘 해서 즐거운 게 아니라 그냥 아빠와 하루를 보내서 즐겁다고 한다. 그런 거구나 뭘 해서 즐거운 게 아니라 아빠와 하루를 보내면 즐겁구나.
책의 제목은 ‘어디서 살 것인가’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나의 지금 집도 다음 집도 르 코르뷔지에의 집이지만 프랭크 로이드처럼 산다. 부족한 부분은 나름대로 해결해 가며 사는 거다. 공원을 걷고 시립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는 노인 일자리 카페가 있다. 흰 머리 할머니가 내려준 커피는 2,000원이다. 아주 맛있다.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찾으면 오늘의 일과가 끝났다. 나는 오늘도 즐겁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