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버먼의 자본론 - 과연,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는가
리오 휴버먼 지음, 김영배 옮김 / 어바웃어북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전문가들이 보는 그런 책이 아니다. 방대한 문헌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이들을 위한 책도 아니다. 전반적인 윤곽을 그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한 입문서‘일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주제에 관한, 가장 초보적인 사실들을 가능한 한 단순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393p

˝사회주의는 낡은 사회를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에서 단절된, 완전한 변화, 새로운 경제 및 사회 질서를 뜻한다. 이 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미래에 사회주의로 대체될, 지금의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재의 시스템인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인 분석에 집중돼 있다.˝ 394p

1.
대량생산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병폐가 극에 치달았던 20세기, 시스템의 우두머리이자 자국인 미국을 분석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혁명 그 자체에 초점을 둔 탓에 사회주의 체제 수립 이후의 모습으로 그 도면을 완성시키지 못 했다면, 휴버먼은 더 나아가 미국에 그것을 대입시켜보고 나름의 밑그림을 그려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부분이 담긴 마지막 두세 챕터는 앞서 기술한 날 선 분석에 비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그의 논리는 그리 매끄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왜 그런고 하니,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를 지닌 사회주의 체제를 마치 실존하는 것 마냥 퍼즐 맞추기 하듯, 억지로 끼워 맞추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 ‘과연 그럴까?‘라는 질문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졌으니 말이다. 70년 전의 글임을 감안하면 그의 외침은 갈 곳 잃은 노동자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1950년 출판 당일로부터 반세기도 더 넘게 지난 지금, 여전히 그의 글은 독자로부터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를 이끌어낸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를 굴리는 바퀴인 우리에게 그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함과 동시에 성찰과 통찰을 불러일으킨다.

2.
과거 20세기의 공황과 전쟁, 무질서를 지나 현 21세기는 유래 없는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들 한다. 바야흐로 사회주의자들이 빨갱이로 몰려 목이 날아가던 시대가 지고, 많은 국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봉인 해제되었다. 그가 혁명을 통해서라도 이룩하고자 했던 체제를 지향하는 글들이 연이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덩달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같은, 전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만한 사실과 사상이 담긴 서적들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이다. 부디 이러한 흐름이 고장난 자본주의의 출구로써, 전쟁을 지양하고 인류의 평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있는 비상구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3.
인류는 과연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질병을 치료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인류가 하나로 묶인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루어진다 한들 그 이후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 것이며, 그때의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우두머리의 위치에는 누가, 몇 명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오를 것인가? 소위 말하는 인간성을 지키고자 한다면, 우두머리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가 필요할 터인데 견제와 더불어 소통의 시스템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나 된 세계가 찾아온다면, 그 세계는 멋진 신세계일 것인가, 우울한 신세계일 것인가? 또한 지금의 대한민국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흐름의 주역이 될 수는 없는가?

4.
리오 휴버먼은 언론인이자 학자, 노동운동가이며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 지식인이라고 책 앞 서면에 소개되어 있다. 진보, 진보, 진보, 그토록 많이 들어왔고 내 입으로 뱉어왔고 글로 써왔지만 여전히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진보의 주체는 누구일까? 현재의 나는 그 대상이 국가적 차원을 넘어 하나의 인류이길 바란다. 다만 인류의 진보를 위해 자행될 각 개인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도 있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희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이든 뭐든, 강압이나 강요와 같은 외압이 아닌 내부적인 힘, 즉 자발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5.
책을 손에 쥘 때면 매번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답 없는 물음으로 매듭을 지어본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살았으며,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