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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세상
주원규 지음 / 새움 / 2013년 3월
평점 :
높은 건물 1층 앞에 선다. 20여 층 되는 건물 꼭대기를 바라본다. 분명 저기도 사람이 살 텐데. 이 아래를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꼭대기에 사는 사람과 1층에 사는 사람은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 아주 다른 세계에 살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너머의 세상』을 읽고 나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족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균열
지수와 현수는 재혼한 부부이다. 지수는 아들인 우빈이, 현수는 딸인 세영이 있는 상태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에 현수에겐 치매 걸린 아버지가 있다. 바로 최인보다. 말만 들어도 사이가 좋을 거 같지 않은 이 가족은 함께 살고 있지 않다. 지수와 인보만 같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이 다섯 명의 가족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자 삶의 풍파에 떠밀려 있다. 치매에 걸려 ‘그곳’에 가겠다며 집을 나선, 어쩌면 사회 속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인보, 높게만 보이는 한 타워팰리스의 집에서 간호조무 일을 하고 있는 지수, 중간 간부로 불공정하게 재계약 불가를 통보 받은 직원들을 위해 함께 시위에 동참하는 현수, 제 자리 하나 잡지 못한 비정규직으로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해도 아무 말 못하는 세영, 같이 나쁜 짓을 저질렀음에도 부자라는 이유로 풀려난 친구 때문에 죄를 더 뒤집어쓰고 방황하는 우빈. 이들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하층에 살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너머의 세상』은 가족들의 사건을 하나하나 병렬로 보여주면서 인보와 네 사람의 삶을 포개어 놓는다. 작가는 가족이란 소재를 매끈하게 이용한다. 단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그것은 네 사람의 공통된 이야기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모두 체제 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수는 시아버지의 생일인 내일을 위해 이런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인보는 집을 나가고, 지수는 그런 인보를 찾으려다 자신의 환자의 자살을 목격하게 되고, 현수는 온 몸에 기름을 뿌리고, 세영은 냉동 창고에 갇히고, 우빈은 친구를 죽인다. 이들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왜 그들은 거기까지 간 걸까? 돌아갈 순 없을까?’(13p) 무엇이 문제일까.
그렇지만 누구도 최인보의 손이 내민 휴대폰을 건네받지 않았다. 아무도 방금 전 이 치매 노인에게 그토록 절박하게 전화한 이가 누군지, 어떤 사연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한시바삐 이 살인적인 정체 구간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목적지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25p
무엇보다 돈이 중요하고, 권력이 중요한 사회 안에서 우리는 어쩌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정체 구간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바빠 옆에 사람이 산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각자를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도중, 다른 곳도 아닌, 소위 우리가 잘 산다고 말하는 지역인 강남을 중심으로 진도 9.0의 직하형 지진이 발생한다. 침묵으로 멈춰버린 세상이 도래한다.
20층과 1층의 차이
지진이 일어난 후, 건물이 무너지고, 구부러진다. 지진으로 세상 안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어쩌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 높은 빌딩이 무너지게 된다면, 빌딩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현수는 상위 층에 있던 정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모두가 사람이니까. 살아 있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니까.(228p) 협상 타결을 위해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결국 그의 주변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타협하던 정우를 구한다. 지상으로, 삶의 연속으로 다시 구해준다. 지상이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을 정우는 느꼈을까.
하지만 이 구조는 약간 이상해보이기도 하다. 지상에 있던 현수가 20층의 정우를 구해주었다는 것.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이 상위 계층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점이 의의가 있으나, 약간 다르게 본다면, 이 구조로 화합에 이른다는 점과 그 상위 계층의 ‘미안하다’는 말이 기름을 뒤집어쓴 사람이 구조한 후에나 나왔다는 점에서는 작가가 지나친 낙관주의로 보이기도 한다.
가족으로 돌아오는 화합, 지상으로의 귀환
균열은 점차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하다. 하지만 이 균열 전과 후는 매우 다르다. 누군가는 죽음을 목격했고, 죽음을 목전 앞에 두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 균열 앞에 그들은 달라진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그들과의 내일을 꿈꾼다. 세영도, 우빈도, 현수도.
우리가 화합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너와 나를 평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일은 아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는 것마저 포기할 순 없다. 균열은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아마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믿을 곳 하나, 그 하나가 그럼에도 있다고 일깨우진 않았을까. 이 소설이 가진, 무지개 같은 위험한 낙관주의에도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건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 세상. 너머의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꿈 꿔보겠다는 것, 꿈이라도 꿔보겠다는 것, 다시 1층에서 20층을 바라보더라도 지상이 힘이 무엇인지,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희망이 없는 세상만큼이야말로, 그 현실이 곧 지옥이 아닐까.
다시 1층에서 20층을 바라본다. 이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후, 내 느낌은 다를까. 20층을 생각할 때, 그 전과 그 후가 다를까. 나 역시 균열을 겪었기를. 너머의 세상을 꿈 꿀 수 있기를 바라본다.
눈앞의 세상이 가로막히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앞이 캄캄하면 캄캄할수록, 그 지독한 어둠의 늪에 빠져드는 순간 품게 되는 본능적인 정서는 절망일 수밖에 없다. 절망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의 무게에 사로잡힐 때 절정에 다다른다.
"주 대리, 미안해. 하지만." "...." "저들도 사람이야." "...." "크레인이 잇고,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어. 일단, 눈에 보이는 저들부터 내리고 구조대가 출동하면 로비 안으로 들어가자."
그렇지만 누구도 최인보의 손이 내민 핸드폰을 건네받지 않았다. 아무도 방금 전 이 치매 노인에게 그토록 절박하게 전화한 이가 누군지, 어떤 사연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한시바삐 이 살인적인 정체 구간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목적지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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