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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초옥 실종 사건 ㅣ 사계절 아동문고 106
전여울 지음, 가지 그림 / 사계절 / 2023년 1월
평점 :
이미 어른이 된 사람으로 어린이의 책을 읽다 보면 무엇보다 책이 어린이가 읽기에 흥미로운가, 재미가 있는가를 눈여겨보게 된다. 활자나 그림보다는 영상이 더 익숙한 어린이 세대에게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재미가 없다면 아예 선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윤초옥 실종 사건은 책의 마무리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할 만한 흡입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좋아하게 되고 잘 읽게 되는 과정에서 거치는 몇 가지 장르적 단계로 볼 때 추리, 미스터리, 탐정물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분야다. 윤초옥 실종 사건 역시 제목부터 윤초옥이 실종될 것이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윤초옥이 왜 실종되었는지, 실종된 윤초옥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단서가 나올 것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책의 앞머리에서 윤초옥이 실종된 경위를 간략하게 알려주고 하필 그날따라 초옥의 어머니가 패물을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나 힘이 좋기로 소문난 운산댁이 유독 초옥이 실종된 그 상황에서는 힘을 못쓰고 산적떼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림으로써 이 실종 사건이 단순히 도적떼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2장 사라진 그넷줄에서 시작한다. 윤초옥 실종 사건에는 세 명의 어린 인물이 등장하는데 남자 아이 이해, 여자 아이 초옥, 홍단이다. 남자 아이면서도 꾸밈을 좋아하는 이해, 양반가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줄타기를 동경하는 초옥,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기녀가 되었지만 거문고 예인이 되기를 꿈꾸는 홍단이 그들이다. 이 아이들은 저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꿈을 이루는 것은커녕 꿈을 말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타고난 신분과 성별이라는 제약 때문에 이들이 가진 꿈은 언제나 말하기도 부끄러운 금기가 된다. 사당패의 꼭두쇠 아들로 태어난 이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줄타기를 하도록 길러졌지만 어쩐지 줄타기에는 재능과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작은 손거울을 들고 얼굴에 곱게 분을 칠할 때 비로소 이해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여자 아이도 아닌 사내 아이가 화장을 좋아하다니 이해 아버지는 그런 이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그저 아기였을 때 이해를 키워준 주모만이 이해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초옥 역시 줄타기를 하고 싶지만 양반가의 여식이 천한 사당패의 줄타기 놀음을 배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초옥은 차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외면할 수 없어 동네 입구의 그넷줄을 끊어 혼자 연습을 하고 또 할 뿐이었다. 이해에게는 짐스러운 의무일 뿐인 줄타기가 초옥에게는 희망이자 꿈이 되고 초옥에게는 그저 양반의 딸로서 시집을 가서 수행해야 할 여성성으로서의 화장이 이해에게는 동경이 된다. 그리하여 우연히 만난 두 아이는 서로의 꿈을 이루는 것을 돕기로 한다. 이해는 초옥에게 줄놀이를 가르쳐주고 초옥은 이해에게 값비싼 화장품을 준다.
이렇게 두 아이가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몰래 몰래 꿈을 키워갔더라면 이 이야기는 초옥의 실종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옥의 실종을 향하여 이야기는 흘러가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물이 바로 홍단이다. 홍단은 가난 때문에 기녀가 되었지만 거문고를 배우며 예인의 꿈을 키우는 아이인데 아해가 초옥에게 줄타기를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초옥에게 진정한 예인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 앞에서 줄놀이를 해보이라고 요구한다. 초옥의 실종을 위해 꼭 필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다소 아쉬운 것은 꿈을 가진 사람에게 꿈의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초옥은 줄을 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사람들 앞에서까지 기예를 선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양반의 자제로서 그것까지는 상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혼자 조용히 줄을 타다가 홍단의 도발로 인해 꿈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물러설 수 없어 받아들인 제안에서 초옥은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을 보고 비로소 세상 사람들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제는 양반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고 사당패로 들어가야 할 이유, 즉 실종이 되어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생긴 것이다.
초옥이 줄 위에서 훨훨 자유를 찾을 때 이해는 묘한 질투를 느낀다. 초옥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꿈을 이루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무리 험할지라도 줄을 타고 내려오는 초옥의 얼굴은 예인의 얼굴이자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해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그 얼굴 때문에 이해는 초옥을 마음껏 축하해 줄 수가 없다. 대신 이해는 자신이 가진 재주, 화장하는 재주로 사당패에 남기로 결심한다. 초옥이 자신의 꿈을 위해 용기를 냈던 것처럼 자신 역시 꿈을 위해 용기를 내어 아버지 앞에 마주선다.
새로운 신분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초옥은 양반가 자식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사당패 줄타기꾼으로 다시 태어난다. 산적떼의 습격을 가장한 실종 사건으로 초옥은 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떠난다. 두 아이가 손을 마주잡을 때 서로의 손이 꿈을 이뤄주는 동아줄이 될 것이다. 물론 초옥은 사당패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양반가로 돌아올 수도 있고 이해는 화장 대신 줄타기를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그냥 열심히 마음을 다 해 해보는 것, 용기를 갖는 일 말이다.
다시 어린이 독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덮으며 문득 오늘날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타고난 제약이 많아 고통스러운 이해, 초옥, 홍단조차도 부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은 지금, 그러나 그런 아이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무엇이든 괜찮으니 용기를 가져보라고, 실패해도 괜찮으니 한번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