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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수전 ㅣ 에세이로 읽는 여성 서사 2
덕민화 외 지음, 여담문학회 기획 / 파란나무 / 2025년 8월
평점 :
<따뜻한 진보주의자>는 여성 서사를 통한 남성서사이다. 진보적 농민운동을 하다 하늘나라로 떠나고 망월동 묘지에 묻힌 제부를 추모하고 생전의 모습을 기리며 화자가 쓴 ‘진혼무’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작고한 할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은 탓인지 여동생은 생활고에 시달릴 거라는 이해타산도 없이 농촌운동가와 결혼을 했고 예견한대로 생활의 어려움은 불 보듯 뻔했다. 제부의 삶은 ‘백일홍’, ‘키우던 닭 한 마리’, 그리고 ‘따뜻한 진보주의자’라는 책으로 대변된다. 마치 화자의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처럼 농민운동을 하다 순직한 제부의 삶이 거룩하고 처연하게 다가온다. 또한 작품에 여실히 나타나지 않지만 그와 결혼한 여동생의 삶은 어떠했을지, 얼마나 곡진할지 읽혀지는 작품이다.
<꽃비가 내리는 날>은 제목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슬픔이 비처럼 스며드는 이야기다. 꽃은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비처럼 내릴 때는 처절하고 바닥에 닿아서는 종국에 사람들의 발밑에 깔린다. 그 시간이 마치 찰나에 가깝다. 사람의 생명처럼…….
“우리 셋의 시간은 꽃비가 내리던 그 날,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로 시작되는 작품은 대학동기 세 사람의 우정과 그 중 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야기이다. 코로나로 한동안 만나보지 못한 사이에 삼총사였던 친구 한 사람이 ‘골육종’으로 투병을 했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여 이들의 만남은 장례식장에서 이루어졌다. 그 날, 벚꽃을 비처럼 맞으며 즐겁게 보내다 단풍놀이를 약속하며 헤어졌는데 그 꽃비 내리는 날이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화자는 망자를 뺀 두 사람의 만남이 조심스럽고 아프기만 하여 아직 연락을 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빈자리를 두고 만남을 가질 때마다 떠난 친구가 떠오를 것 같아서다. 화자는, 꽃비만 내리면 떠난 친구가 그 속에 섞여 내리는 걸 볼 것이다.
<그리움은 늙지 않는가보다>는 1941년생 최옥분여사, 즉 어머니의 얘기를 소설같이 구성하여 들려준다. 어머니가 막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아버지는 더 잘 살아보려고 일본으로 갔고 1년 남짓 지나서 한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어머니는 이제 겨우 나이가 스물다섯. 어린 딸을 시댁에 남겨두고 그녀 어머니는 강제 재가를 당한다. 최 여사의 엄마는 오장육부가 찢기는 아픔을 견디며 딸을 위해 떠나는 길을 택한다. 최 여사는 친 부모 없이 70년을 살았다. 그렇게 엄마도 영영 못 만날 줄 알았다.
하늘의 감동일까. 수소문 끝에 어머니가 지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70년만에 극적인 모녀 상봉이 이루어졌다. 눈물로 상봉하며 서로를 포옹하고 잃어버린 세월이 그 간극을 메운다. 최 여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게 복수라도 하듯 살아남기 위해 세상과 싸우듯 살아왔다고 한다. 이제라도 실컷 아버지, 어머니를 마음껏 부르고 싶다고 한다.
한편의 소설이나 다큐드라마 같다. 여성의 한이 스며있어 그 애달픔이 지극하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이 맞물려 시대적 아픔도 담겨 있다. 귀한 소재를 좋은 문체로 풀어냈다.
<반딧불이, 자유>는 자유로움의 소중함을 여성의 얽매인 결혼생활을 통해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의 별이 된, 맹그로브 숲을 지키는 반딧불이가 된 친구이야기가 아프게 묘사되어 있다. 시집살이는 고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일방적이었으며 남편의 구속은 숨이 막혔다. 자신이 번 돈을 마음대로 쓰지도 못했다. 암이 찾아왔고 죽음을 맞이했다.
생애 처음으로 떠난 여행, 코타키나발루의 보르네오 섬에서 만난 반딧불이를 보고 “잡혀 살면 죽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야지.”라고 말한다. 죽음 같은 구속의 삶을 사는 자신을 반딧불이에게 투영하고, 그녀 자신 또한 그 말처럼 홀연히 떠난 것이다. 자유가 더 그립다는 듯이.
친구의 암투병과 죽음을 반딧불이에 비유하여 ‘자유로움’이라는 주제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검은 화석>은 제주도에 살았던 할머니의 삶과 함께 보낸 화자의 이야기가 단편적이지만 실감나게 묘사되어 그 시대의 제주도의 생활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은 항아리속에 든 일원짜리 지폐, 밭 주위의 거친 용암, ‘빼때기’라는 건조된 고구마, 밭 너머로 보이는 하얀 모래더미와 언덕 위로 펼쳐진 옥빛 바다, 온통 용암이었던 바다놀이터, 하얀 무명의 해녀복, 새까맣게 그을린 꽁치 껍데기. 생생한 이런 묘사들이 이 작품을 생기있게 살려낸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꽁치의 속살을 발라주고 당신은 새까만 껍데기를 먹어서일까. 위암이라는 큰 병에 걸리고 만다.
할머니는 화자인 손녀의 가슴속에 아련하게 ‘검은 화석’이 되어 있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 시대의 모습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하여 잘 녹여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