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왕자 -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마지막 왕자 도토리숲 저학년 문고 5
김바다 지음, 허구 그림 / 도토리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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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업적을 많이 보는 것 같다.

그 사람은 역사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겼으며 그 업적은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 중에서 업적도 또 그 어떤 역사적 가치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이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왕자, 이우.

어쩌면 조금은 낯선 인물인지도 모른다.

 

운현궁 왕자로 알려진 이우 왕자는 1912년에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139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손자이며,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후손이 없었던 이준용의 양자가 되면서 이우 공 전하로 불리게 된다.

11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서 유년학교에 입학하고 1926121일 공포된 왕공가궤범에 따라 일본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 진학한다.

조선 왕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일본 황실과 조선황실의 혼혈결혼정책으로 백작 야나기사아 야스쯔구의 딸과 결혼하기로 내정되어있었으나 이우 왕자는 이를 거부하고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한다.

1945, 이우왕자는 히로시마 제2총군교육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히로시마로 간다.

194586, 리틀보이(히로시마상공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사망한다.

 


자존심이 강했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우왕자.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군인으로 사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했던 이우왕자는 죽어서도 그 수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우왕자의 명부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있기 때문이다.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었던 사람들의 명부가 있는 곳에서 일본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족들은 야스쿠니신사 합사에서 이름을 빼달라는 소송을 했으나 야스쿠니신사에 이름을 올리면 모두 하나의 신이 되어 뺄 수 없다는 비상식적인 교리로 유족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전쟁의 가해자이던 일본은 미국이 떨어뜨린 두 번의 원자폭탄으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평화기념공원이 세워질 때, 일본 정부는 한국인을 위한 위령비나 탑을 세울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재일한국인 피해자 가족들이 돈을 모아 이우왕자가 원자폭탄으로 피폭된 채 발견된 장소에 위령탑을 세웠다.

 

이 동화의 작가 김바다 님의 소망처럼 일본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로부터 합사를 취하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이우왕자의 넋이 자유로이 대한민국의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을까 한다.

 

가슴 아픔 역사의 한모퉁이에서 살다가 간 이우왕자.

그래서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인 8월에는 기억해야할 날이 많은 듯 하다.

86일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8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815일 광복절

그리고 가장 기억해야할 날 829일 일본이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날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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