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태후>를 반쯤 읽다 치워뒀었다. 책이 크기도 했고, 내용도 너무 무거워 그 당시 내가 읽기엔 너무 답답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피오니>는 크기도 <서태후>보다 훨씬 작았고(사실 그래서 눈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내용도 훨씬 편하게 다가왔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내용은 단순하지만 시대적 배경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에서 핍박을 받으며 세계 각지로 흩어져버린 유대인들.. 중국에 정착한 유대인 마을의 모습과 그 안에서 인종간의 갈등과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어릴 적 유대인 가족의 집에 하녀로 팔려 간 '피오니'는 그 집의 아들 '데이빗'과 남매처럼 자란다. 신분의 차이를 느끼고 데이빗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쯤 피오니는 이미 데이빗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며 데이빗 옆에 남아 있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 알 만큼 영리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버렸다. 한 편 데이빗은 중국인과 유대인의 피가 섞인 아버지와 순수 유대인 혈통인 어머니의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와 중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중국인 대상의 딸인 '쿠에일란'과의 결혼을 권하고, 어머니는 랍비의 딸이자 순수한 유대혈통인 '리아'와의 결혼을 강요한다. 사실 선택은 데이빗이 아니라 피오니가 하게 된다. 리아의 카리스마와 아름다움에 겁을 먹을 먹은 피오니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은 쿠에일란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일을 꾸미게 되고 데이빗의 마음은 서서히 쿠에일란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리아는 데이빗을 다치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토록 차분하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던 랍비의 딸 리아가 갑자기 칼을 휘둘러 데이빗을 다치게 하다니...아마도 자신의 사랑이 보상받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그렇게 순간적인 기분에 휘둘린다는 게 이전에 묘사된 리아와 너무나 달라 조금 놀랐었다. 리아를 떠나 보내고 데이빗의 어머니는 상심에 젖어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리아의 아버지인 랍비는 정신줄을 놓게 되고 데이빗은 죄책감과 자신의 민족에 대한 고뇌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쿠에일란과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고 그런대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다 함께 궁으로 여행을 하게 되고 궁에서 피오니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수석집사때문에 데이빗은 피오니에 대한 마음이 분명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피오니는 데이빗을 구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데이빗과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던 피오니는 자신을 찾는 데이빗과 쿠에일란을 뿌리치지 못하고 원장 비구니가 되어 데이빗의 집안을 돌보며 그렇게 함께 늙어간다.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피오니가 데이빗에 대한 마음은 분명 사랑이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으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소유욕또한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데이빗이 피오니에게 갖는 감정도 사랑일까? 오랜 시간을 함께 있었던 익숙함이 아닐까? 데이빗은 부인인 쿠에일란도 사랑하고 리아도 사랑하며 피오니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 마음이 사랑일 수 있을까? 피오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는 문을 잠가버리고, 피오니가 절에 들어가고 난 후에 괴로워하기 보다는 안정된 삶에 오히려 만족을 느끼는 사람...그 사람의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또 책을 읽으며 유대인이 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유대인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그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책에서 표현한대로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 특별히 누군가만 사랑하실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작가는 중국인들을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작품에 묘사된 중국인들은 모두가 친절하고 따뜻하며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 외국인으로서 중국에서 살아갔을 그녀가 만약 힘든 생활을 했었다면 작품속의 중국인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묘사되진 못했을텐데 그녀는 정말 중국에서 행복했고 그 곳을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작가를 조금 알게 되었으니 치워두었던 <서태후>를 다시 꺼내 천천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