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이리스를 위하여
피레테 / 조아라 / 2020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의 개입이나 사건의 진상이 쉽게 예상되는 등 뻔한 느낌이 있어요.
그럼에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호감가는 캐릭터들 설정 때문에 한편의 영화 등으로 보면 잘 봤을 것 같아요.
오솔길을 걷다보면 드러나는,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서고, 밖에서 보이는 화단, 건물 안 책장이 늘어선 복도, 책 냄새, 약품 냄새, 햇빛이 쏟아지는 열람용 책상, 책 수레, 박스, 출납부 등의 서류, 삐걱거리는 사다리, 그 위에서 곧잘 책에 빠져드는 주인공...
이런 분위기를 떠올리게 되어서 좋아요.
그 상상의 기반이 되어주기도 한 아늑한 배경의 표지 일러스트도 참 좋았습니다. 구매할 때부터 표지 때문에 눈이 갔고, 지금도 표지랑 같이 소장할 수 있는 점 때문에 별 하나를 더 얹을 정도예요.
주인공인 이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가끔씩 재앙이 나타나고, 그 재앙을 없애기 위해 '아우렐의 후예'라 불리는 태생적 이능력자 100명 중의 1명을 재물로 바쳐야 합니다. 후예들 중에서도 제물로 지목되는 기준은 재앙의 시기에 눈색이 금안에서 적안으로 바뀌는 인물이고요. 역사적으로 제물로 바쳐지는 것에 저항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그 후예들에게 일감을 주고 고틀리프라는 전담부대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리스는 이 아우렐의 후예 중 1명으로, 갖고 있는 이능은 '기억력'입니다. 살면서 감각한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여 필요할 때 떠올려 낼 수 있어요.
이리스는 자의적이고 무책임한 홀애비의 손에서 고아원에 버려집니다. 어린 이리스는 아버지를 믿고 기다리느라 고아원의 원생들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습니다. 커서 도서관에 취직된 후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보려고 했지만 '기억력'의 이능으로 횡령을 지적했다가 믿었던 상사들에게 모함을 받고 도서관의 구석진 14번째 서고로 유배되다시피 배정됩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나 주위 사람들에게 '기억력'의 이능은 쓸모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리스는 자신을 은연 중에 가치 없는 것, 쓸모없는 것,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처지의 14번째 서고에 애정을 갖고 착실하게 관리합니다.
그런 이리스의 동떨어진 14번째 서고에 어느날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아우렐의 후예로서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고틀리프 부대 소속의 군인이요. 이리스에게 어떤 표식이나 징후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그는 14번째 서고에서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위에 서술한 세상의 재앙, 제물이나 골칫거리 아버지 말고도 도서관의 횡령, 납치 및 유괴, 인체실험 등의 소재가 있습니다. 도서관의 횡령이 이능력에 대한 질투와 인체실험 등의 어마무시한 스케일로 이어지게 되는 부분에서 저는 부자연스럽단 느낌을 받았어요. 고립되어 있던 이리스가 능력을 발휘하며 공적으로 한 발짝 선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긴 했지만요.
스케일 큰 일을 벌이게 한 것 치고는 악역 여조들의 동기나 마무리 서술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조(특히 악역 여조. 여캐를 식상한 악역으로 쓰는 걸 별로 보고 싶진 않지만 약간이나마 신경이 들어간 티가 나면 그것도 괜찮아요.)들을 볼 때 작품 호불호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이 정도면 괜찮았어요.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도서관에 처음 찾아온 베르너가 일을 배우는 부분이에요. 앞과 뒤를 맞춰보며 웃음이 나오게 되네요. 말투 바꾼 것도 좋고요(생판 남에게 초면부터 반말 쓰는 남자는 누가 봐도 불쾌감 맥스인데ㅋㅋㅋ과거의 이리스는 얼굴 때문에 봐준 것이 분명함).
또 하나는 저 세상의 서고 풍경과 그 안에서도 나름 적응하며 일하던 이리스입니다.
이리스는 과거사 때문에 땅굴 파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지만 고립된 채로도, 끝을 보는 운명 속에서도 착실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자신의 서고를 관리하는 주인공은 누가 봐도 애정이 쌓일 만한 인물이네요.
단편으로 읽기에 나쁘지 않은, 따뜻한 이야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