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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직접적인 스포일러 언급을 피하려고 했지만
충분히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리뷰입니다.
이 소설은 특별히 긴박하거나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조형과 구성이 적절하고 매력적입니다.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의 다크히어로적 속성이 강조되어 흥미가 돋게 하고, 사회고발적 이슈도 들어있어 마음을 울렸습니다.
영국의 환상열석 유적지를 따라 연쇄살인이 일어납니다. 과거의 실수로 인해 고향 컴브리아에서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던 경사 포는 살인자가 시신에 남긴 메시지로 인해 다시 수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연쇄살인의 피해자는 서로 일면식이 없다 알려진 고령의 부유한 남성들로, 살인자는 시신에 주인공 '워싱턴 포'의 이름과 함께 특수한 문자를 새깁니다.
포는 이런 단서들에서 실마리를 잡아내어 연쇄살인의 궤적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중범죄분석섹션의 동료들이 포와 함께 합니다. 포는 뛰어난 직감과 함께 번거로운 절차를 무시하는 행동력과 신념을 지녔기에 수사관료제 속에서 외면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외면받던 신세의 천재 틸리 브래드쇼는 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매순간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신속한 통계를 내줍니다.
범인은 시신의 가슴에 포의 이름을 새겼으나 포를 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연쇄살인은 범인이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의 일환입니다. 주인공 일행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어 전반적인 긴박성은 떨어집니다. 대신 영국 컴브리아 지역의 황량하고도 그윽한 풍경을 떠올리며 포의 여정을 차분히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범인이 엽서를 보낸 사실을 미루어 초반부터 그 정체를 짐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추리소설을 그닥 읽어보지 않았는데도 그랬으니 다른 독자분들도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감을 발휘하는 모습과, 작품 곳곳에 깃든 지역적 특색, 수사과정의 실제적인 묘사에서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히스가 듬성듬성한 황무지, 돌로 지어진 낮은 집들, 튼튼한 양들이 하룻밤새 덮이는 눈과 안개를 견뎌내는 곳. 미감이 훌륭하진 못한 도시의 관청과 이른 아침에 조식을 파는 카페들. 공공기관에 협조를 요청할 때 부딪치게 될 관리자들과 실무자들의 묘사에서 이국적이고도 친숙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식사묘사 역시 장황하진 않지만, 무엇을 먹는지는 꼭 나열되어 있어 배가 고프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등장인물들에게도 하나같이 정이 갑니다.
포는 직감이 뛰어나고 적극적이지만, 이에는 이로 불의를 응징하며 국가의 법보다는 자기 마음의 인간적인 법도를 따르고 싶어하는 군인출신의 중년 남성입니다. 틸리는 수학과 컴퓨터, 통계와 해석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대인관계가 서투르고 순진무구한 젊은 여성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을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포는 틸리를 적절히 배려하고, 틸리는 윗선에서 외면받는 포의 수사에 유용하게 손발을 맞춰줍니다. 이런 과정에서 소소한 우정이 자라나는 모습도 즐거웠습니다.
경위 플린은 포의 막가파적 행동력에 의해 자신의 권위가 침범받는 느낌을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역시 포와 우정을 유지하며 도움을 줍니다. 리드는 허물없는 소꿉친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근무지에서 적절한 자료들을 전해옵니다.
포의 동료들이 인간적이라 좋았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범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살인과 그 동기를 알아달라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는 고생했지만, 결국 그 범인과 진실을 완벽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범죄는 가해자에 비해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고발했을 때 더한 모욕과 멸시를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에 더 은폐되기도 합니다.
제 모교에서 한 남자선배가 남자교사를 졸업 후 몇년이 지나 고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해자는 모교가 유명세를 타게 해준 부서의 담당교사라 후에 교장직까지 올라갔지만, 알고 보니 그는 동종업계 남학생 대상으로 꾸준히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피해자가 한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익명으로 고발했지만 선배는 그 업계에서 일하고 있었고 모교의 영향력이 컸기에 주변인들은 모두 그를 말렸으며 은폐부터 시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배는 용기내어 고발을 했고, 교장직까지 올라갔던 교사는 결국 물러났습니다.
고발자가 그 뒤로 정상적인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었을지, 가해자가 그 뒤로 충분한 처벌과 감시를 받았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선배의 고발이 아니었다면 그 교사는 피해자를 더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갔겠죠.
포는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러한 불의에 대항하는 인물입니다. 자주 절차와 규칙을 위반하며, 필요하다면 주먹을 들지만 그것은 그의 인간성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공 포의 성향과 더불어 연쇄살인의 뒤에 숨어 있던 처참한 사회적 진실은 마치 독자인 저에게도 정의와 선에 대한 적극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유능하고 고독하게 정의를 지키거나 대의를 따를 수는 없어도,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심 갖고 따분한 관련자료를 소상히 읽어본다거나 하며 필요한 때에 사리판단하여 용기를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구글에 검색하여 불속으로 뛰어드는 방법을 찾아보고 실행했던 틸리처럼요.
덧붙여 글이 가끔 생소한 순우리말과 가감없는 비속어들을 사용하여 번역되었는데,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거나 혀끝에서 굴려보며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