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 - 부자들이 들려주는 '돈'과 '투자'의 비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샤론 레흐트 지음 | 형선호 옮김 / 민음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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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처세술'에 관한 책이 있다.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주로 봉급생활자와 자영업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 끝없이 위로 진급하는데 필요한 행동방식의 체계를 다룬 것이다. 이런 책에서는 대개 대인관계 속에서 주위 사람들을 활용하는 방법들이 다뤄진다. 또 하나는 이 책과 같이 사업가와 투자가로 진출하는 방법을 다룬 책이다.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느 경우에나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가치의 위계질서 속에서 돈과 권력의 크기를 불려나가는 기술을 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인생의 목표는 묻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90퍼센트"의 군중이 아닌 "10퍼센트"의 경제적 상류층에 속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이 소수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간단히 "변명'이라 잘라 말한다. 인간이 자기 생을 조직하는데 사용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간단히 숫자로 바뀔 수 있는 경제적 부의 크기로 환원돼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자기들이 '부자 아버지'라 부르는 어느 상담가의 도움으로 돈을 벌게 됐다며, 그 상담자가 자기들에게 해줬다는 충고를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사업가는 사람을 부리고, 투자가는 돈을 부리고, 이때 인간은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사업 컨설팅에 관한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전문성이 좀 부족한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이 책의 주요 독자들이 정말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 책의 효용은 봉급자나 자영업자들과 사업가와 투자가로 갈라진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구조 속에서 계층 상승을 바라는 대중들의 욕구를 허구적으로 충족 시켜주는데 있을 것이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이런 책에서 흔히 사용하는 어떤 어법이다. 가령,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두려움, 냉소주의, 게으름, 나쁜 습관, 거만함을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다. 가령 어느 사람이 특정 분야에 과감하게 투자를 해서 성공했을 때 그것은 '결단력'이라 불리고, 실패했을 경우에는 '무모함'이라 불린다. 반면, 어떤 사람들이 특정 분야에 투자를 하지 않았는데 그 분야가 사양길로 접어들 경우 그것은 '신중함'이라 상찬되고, 마침 그 분야가 갑자기 각광받을 경우 거기에 배팅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 '소심함', 혹은 '결단력 부족'이 된다. 문제는 똑같은 행위가 어떤 술어로 기술될지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우리가 흔히 예언서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실은 미래가 아니라 대부분 과거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대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 성공이 자기들의 노력, 능력 혹은 타고난 소질의 결과라고 믿고 싶어한다. 여기에 경제적 차이는 전적으로 개인들 사이의 능력 차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미국식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가미된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대개의 경우, 경제적 차이는 세습된다. 이 책의 저자들도 인정하듯이 자수성가한 사람이 드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 냉소주의. 게으름, 나쁜 습관, 거만함"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게다. 게다가 시장은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 경제학이란 "과거에 했던 예언이 오늘 틀린 것을 확인하고 내일 수정하는 작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불확실성이야말로 계획경제와는 다른 시장경제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은 마치 자본주의적 시장을 개인의 특정한 태도 변화에 의해 바꿀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곤 한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어쨌든 저자들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제시하는 항목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정신의 힘, 선택의 힘, 협조의 힘, 배움의 힘, 자기 통제의 힘, 좋은 조언의 힘, 공짜로 무언가를 얻는 힘, 초점의 힘, 신화의 힘, 주는 것의 힘. 사실 이런 일반적 잡동사니들은 굳이 경제적 성공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공 스토리에서 흔히 거론되는 항목들이기도 하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저자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경험담을, 저 일반적 명제들을 경제학적 명제로 전화시키기 위해 슬쩍 덧붙였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열거한 인격의 힘과 경제적 성공 사이에서는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별 인과 관계가 없는 듯하다. 이런 류의 책은 한마디로 '현대판 주술'이다. 말하자면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잠시나마 허구적으로 실현하고, 현실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미신이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반박하는 분들도 있으르지 모르겠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무당의 굿이나 점쟁이들의 점괘도 가끔은 불안하고 위축된 사람들을 돕는 경우도 있다고.

고대인들은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가꿔 완성시키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인들이 갖고 있던 이 존재미학은 오늘날에는 한갓 '처세술'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다. 나는 이것을 현대사회의 한 징후로 본다. 물론 경제적 자유는 인간 행동의 자유를 넓혀준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부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내 주위의 부자들은 그 경제적 자유를 지키느라 부자연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독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진리는 그 반대이다. 실은 이 책을 사서 읽는 독자들이 저자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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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신의 존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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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교이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은 있다고 생각하며, 느낀적은 없지만 아마도 있을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그 신의 형태가 예수나 하나님, 부처님, 알라 등등의 형태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신의 경지라 함은 인간의 사고체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더구나 그 신의 형태가 너무도 인간과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 가끔은 소나 다른 형태의 신을 믿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 땅을 떠나 본 적이없다. 다만 TV를 통해서 그리고 가 봤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미국이, 일본이, 영국이, 아프카니스탄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내가 우주를 봤을리는 만무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나는 달에 가 본적도 없다. 그러한 나의 사고는 몹시 편협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 넓은 우주에서 마치 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생각하는양 살고 있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이 넓은 우주에서 사고가 가능한 존재가 오직 인간이라면 그 얼마나 공간 낭비겠는가.

외계인도 있을 수 있고 신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단지 있다고 생각할 뿐 만난적도 없고 뭔가 신세를 지고픈 생각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을 혹은 인류를 구원해주고 뭔가 해결해줄 존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만났을때 내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왜 그들은 믿지 않는 나보다도 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있으니까 믿는다'고. 하지만 무엇을 왜 믿을까? 과연 예수나 하나님이 뭔가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테면 천당)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를 믿으며 따르고 사랑할까?

이 책은 내가 예전부터 늘 생각했던 문제들을 다시한번 짚어준다.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이란 너무도 인간적이다. 그들은 질투를 하며 믿고 사랑하라고 하면서 대신 천당과 내세를 보장해준다. 이것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신이 그렇게 인간의 사고에서 이해할 만한 무언가는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그 신이 바라는 것이 너무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신이 그렇게 인간적이라면, 또는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 가능한 무언가라면 우리가 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건 아닐까?

책은 성경에 적힌것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을 한다.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성경의 해석은 너무나도 그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경 조차도 신의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면 그 성경은 인간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이 외국어로 쓴 것도 번역을 하면 그 뜻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신의 말을 사람이 옮겼을때 전혀 실수가 없었을까? 또한 성경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쓴 것을 모은것이고, 그 중에서도 누락된 것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질문을 했을때 기독교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성경은 사람이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이 임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오랜 세월동안 베껴쓰고 또 베껴쓰면서 늘 성령이 임해서 단 한치의 실수도 없었을까? 아니 그보다 왜 신이 직접 쓴게 아닌 인간이 그걸 써야만 했을까? 모세의 십계명을 보자면 돌판에 신이 직접 쓰질 않았는가. 성경은 길어서 다 못썼다는 변명은 말도 안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이 쓴 것이며 그 해석에 따라 혹은 원본 자체가 틀린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인들은 내 얘기를 들으면 언제나 사탄과 마귀 얘기를 했다. 나는 내가 사탄도 마귀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너무나 확고한 믿음 앞에서는 무서워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신이 말하는 기쁨과 신이 말하는 고통역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라 신도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만큼 내게는 이상한 것이지만. 그들은 이미 눈을 닫고 귀를 막고 믿으므로 그 눈을 뜨고 귀를 열게 할 힘이 없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은 너무나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믿음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믿고 있는 형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을 가한다. 다만 책은 예를 들때 조금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게 누굴 바보로 보나?' 하는 마음을 가질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한번이라도 그들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정말로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민과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기독교인들이 읽었을때는 상당히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지만. 신은 있다고 믿되 그 신의 형태도 모르겠고 바라는것도 없는 내 경우에는 흥미롭게 잘 읽었다.

끝으로 하나 묻고 싶은게 있는데 하나님은 맨날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질투가 많은걸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하고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바로 불지옥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말하는 자비라는 것이 오직 자신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어야만 발휘되는 조건부 자비라면 그게 정말로 자비이고 사랑일까? 설사 인간은 그런다 하더라도 신이 그렇다는 것은 너무 매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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