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혼을 했으며 조울증을 앓았던 시인 존 베리먼은 '나의 시가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는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시가 필요하다.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나무들, 별들, 모든 것을 악기로 바꾸는 바람, 그리고 세상의 광대함과 만나기 위해.


루미의 시는 단순하고 깊다. 시련이 찾아왔을 때 그의 시는 위안을 준다. 누구나 슬픔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그 슬픔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성장의 비탈일지도 모른다. 루미는 쓴다. 


슬퍼하지 말라.

네가 잃은 것은 어떤 것이든

다른 형태로

너에게 돌아올 것이니.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썼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들에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지 못하는 것보다 본래의 나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치명적이다. 나에게 필요한 일은 꽃봉오리에게 하듯이 "너는 사랑스러워!"하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봉오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자신에 대한 축복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다.


갑작스러운 마비에서 회복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활동이 기적이 되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머리 좋은 사람들의 의심 때문."이라는 부코스키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 영리하기 때문에 '원하는 일을 하면 안 되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찾아내는지도 모른다. ... 자신이 원하는 일을 '왜 할 수 없는지' 이유를 찾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는 사람이 있다. 거기서 인생이 나뉜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불행과 원하는 것을 하는 행복의 차이가. 


고통과 슬픔은 혼자 지고 가야 한다. 타인의 위로가 힘을 줄 순 있어도 대신 지고 갈 수는 없다. 


(앨리스 워커는) 또 다른 시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이 나를 홀로 서게 만들고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만들고

혼자서도 살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성서의 잠언에도 '사람은 사람에게 부딪쳐야 다듬어진다.'라고 적혀 있다.


인간은 소유하고 경험하고 연결되기 위해 태어나지만 생을 마치는 날까지 하나씩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잃어버린 것에 아파하되 그 상실을 껴안는 것을 에머슨은 '아름다운 필연'이라 불렀다. 상실은 가장 큰 인생 수업이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같은 내면'이다. '같은 내면'의 발견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이다. 따라서 '같은 내면'에 이르지 못하면 그 사랑의 행위는 무의미하다. "섹스가 부족해 죽는 사람은 없다. 단지 사랑이 부족해 죽을 뿐이다."라고 어느 작가는 썼다.


시인 존 애쉬베리는 어려서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회와의 영향을 받아 '캔버스에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추상적이고 난해한 시들을 많이 썼다. "나의 시는 앞뒤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 않겠다'는 결코 부정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것만큼 자신에게 신념을 주는 긍정적인 선택도 없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곳에 이르기 위해 먼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삶은 내가 선택한 것들뿐 아니라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로도 이루어진다.


우리는 평범한 것들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지지해 주는 것들과. 


누군가가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 그를 따르지 말 일이다. 그 해답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니라 그의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들어올 수 없는 옹색한 원을 가진 이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 대한 무한한 수용으로 신까지도 그 원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두세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긴 시를 쓰는 경우가 있다. 아마릴리스가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마침내 줄기 끝에서 한 송이 선홍색 꽃을 피우듯이,


영국 시인 프란시스 톰슨은 '별을 흔들지 않고는 꽃을 꺾을 수 없다'라고 썼다. 꽃 한 송이를 꺾을 때마다 파장이 전해져 어느 별에선가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식하지 못한 채 나의 행동이 다른 생명체를 죽이거나 상처 입힐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배려는 그것까지 헤아리는 것이다.


어떤 것을 알려면 - 존 모피트


어떤 것을 볼 때 

정말로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


유명한 설교사가 어느 영적 스승과 함께 지낸 후, 스승의 투박한 말에 비해 자신의 설교가 초라한 이유를 알았다. 자신의 설교는 시끄러운 주장이었지만, 스승의 말은 침묵을 담고 있었다. 단순하게 감탄하며 사는 대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 너무 많은 것들 속에 너무 결핍된 인생.


사랑을 하게 되면 평소에 관심 갖지 않던 것들까지 두루 사랑하게 된다. ... 갑자기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사랑은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주위 모든 것들의 아름다운 속성까지도 인식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기중심적이었던 자아를 열어 더 많은 세상과 만난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존재의 확장성이다. ... 사랑이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능력이다.


틱낫한은 <살아 있는 붓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서 말한다. "북쪽으로 가려고 할 때 북극성을 길잡이로 이용할 수 있지만 북극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극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노력은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 자신의 장소에 도달하는 일이다."


"시는 일종의 '유리병 편지'와 같다.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의 해안에 가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인이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 말이다."-파울 첼란(독일 시인)


'과일의 맛이 과일 자체에 잇는 것이 아니라 미각과의 만남에 있는 것처럼 시의 의미는 종이에 인쇄된 단어들 속이 아니라 독자와의 교감 속에 있다.'라고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나는 당신이 더 많은 시를 찾아서 읽고, 세계를 이해하고, 인생의 해변에서 시를 낭송하기 바란다. 어디선가 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유리병 편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