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지둔-김수영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이 생기었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었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나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

고난돌기

백골의복

삼복염천거래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위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



<김수영 전집1 시>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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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김수영 전집 1 시>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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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위하여 -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리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를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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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의 애인-정호승


눈 내리는 새벽을 향하여 기도하라.

착하게 살기 위하여

너무 일찍 태어났던 청년은 오늘

슬픔을 향하여 칼을 던지고

새벽 눈길 위에 홀로 쓰러져 우나니

애인이여

마음이 가난한 어느 청년의 애인이여

눈을 여전히 슬픔 위에 쌓이는데

슬픔에 대하여 혹은 운명에 대하여

그대는 더이상 말하지 말고

눈 내리는 새벽을 향하여

다만 홀로 기도하라.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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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닦는 소년-정호승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이 세상 별빛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목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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