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과거의 미술을 본다. 말하자면 매우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는 원근법을 설명하는 용어 속에 나타나 있다. 유럽 미술 특유의 원근법의 관습은 모든 것이 관찰자의 눈에 집중된 것으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다. ... 원근법은 마치 이상적인 것처럼 시야를 조직했다. 원근법을 사용하는 모든 소묘와 회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메라, 특히 영화 카메라는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카메라의 발명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가시적인 것은 이제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점은 즉시 회화에 반영되었다. 


원작의 유일무이한 독자성은 그것이 복제의 원작이라는 사실에 있다. ... 원작의 의미는 그것이 독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유일모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온다. ... 원작의 가치는 그것의 희소성에 따라 정의된다.


내셔널 갤러리는 다 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의 소묘 복제본을 다른 소장품의 어떤 그림보다도 많이 판매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소묘는 학자들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미국인이 이백오십만 파운드에 그것을 사려고 하자 갑자기 유명해졌다. ... 그 작품이 감동적이로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모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존재의 모든 면과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을 늘 감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자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성공 여부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거울은 무엇보다도 여자가 스스로를 하나의 구경거리로 대하는 데 동의하는 것처럼 만들어 준다. 파리스의 심판은 벌거벗은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 혹은 남자들의 겉으로 드러난 않는 생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테마다. ... 파리스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상으로 준다. 그런 식으로 아름다움은 경쟁적인 것이 된다. (오늘날 파리스의 심판은 미인 선발대회가 되었다.)


케네스 클라크는 자신의 책 <누드>에서 벌거벗은 몸(naked)은 그저 옷을 입고 입지 않은 상태인 반면, 누드(nude)는 예술의 한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전시된 작품의 숫자에 압도당해, 그들 중 겨우 몇몇 작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한탄스러운 무능함에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천재'라는 개념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혼란은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또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 잡는 매력(glamour)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바로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제 광고 자체와 그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것들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이익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자신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고에 미술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훌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미술은 세상 사람들이 부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장식의 일부이다. 그러나 미술작품은 또한 물질적인 관심보다 우월한 문화적인 권위 및 위험의 한 형식을 암시하며, 심지어 지혜의 한 형식까지도 암시한다. 유화는 문화적인 유산에 속한다. 그것은 교양있는 유럽인들이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얘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술작품이 광고에 쓸모있게 인용되는 것이다.)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물품을 사는 일이 사치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가치있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이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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