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일러 주고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책을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은 먹빛처럼 어두워지고 앓는 사람마냥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고함질렀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깨진 내용을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나의 호, 청장은 푸른 백호를 말한다. 청장은 고요히 물가에 살면서, 눈앞에 지나가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만 먹고사는 맑고 욕심 없는 새라고 한다. 하늘처럼 미더운 새라는 뜻인지, 하늘도 그 고요한 성품을 믿는 새라는 뜻인지, 사람들은 '신천옹'이라고 높여 부른다.



박제가의 시는 참으로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 그 가운데 나는 이 시를 특히 좋아했다.


'붉다'는 그 한 마디 글자 가지고

온갖 꽃을 얼버무려 말하지 말라.

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 있으니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봐야지.


언젠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박제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유득공의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려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는 그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남아있다고 했다. 어쩌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도 여러 번 들어서 그런지 내 귀에도 자연스럽게 익은 말이다. 잘못을 저지른 그를 감싸 주며 다독이던 그날 밤 어머니의 목소리.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준 핏줄은 서러웠지만, 사랑이 담긴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의 가슴에 따스한 피를 돌게 했다. 나의 벗 유득공은 그러한 따스함을 세상과 벗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책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하고, 너무나 잘 맞는 서로에 오래도록 취하였다. ... 다른 벗들도 모두 책보기를 즐겨 하였으나, 이서구와 나의 경우는 좀 더 특별하였다. 우리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글자 하나까지 꼼꼼히 들여다보며 적절하게 씌여졌는지 파고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귀한 책일수록 손으로 옮겨 쓴 필사본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나오면 다른 책들을 찾아보거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서로 맞추어 보았는데, 대부분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신분의 굴레가 있는 현실 속에서 나와 같은 서자들은 변두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누가 중심이고 누가 변두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스스로가 중심인 것이다. ... 지구가 둥글다는 담헌 선생의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모습에 대해서만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변두리 자그마한 나라에 산다 하여 큰 나라의 눈치만 보지 말고, 피어날 길 없는 신세라 하여 주눅들지 말고 당당히 살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리라. 


담헌 선생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음악과 천문학, 수학뿐 아니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실제 생활에까지 이어졌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사회, 그로 인한 억울함이 많은 사회, 나라 살림을 잘못해 늘 문자가 부족하고 백성이 어려움을 겪는 사회는, 선생이 생각하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었다. 선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바꾸려면 여러 가지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하셨다.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는 "천하의 모든 책을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중국뿐 아니라 중국과 교류가 활발한 세계 여러 나라의 책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노력을 거쳐 1782년에 만들어진 <사고전서>는 무려 칠만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오랑캐 나라라 하여 우리가 무시하고 외면하는 동안, 그들이 이룬 업적은 대단하기만 하였다. 전하는 사신 일행이 중국에 갈 때마다 진귀하고 새로운 책을 수집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