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화제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라, 혹은 그 사람이 가봤던 장소 등,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것들뿐이었다. ...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표현한 대목이었다. 그런 내용은 내게 A에 관한 무언가를 가르쳐주었고,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확신을 주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말고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 그 사람이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알려오면 - 그런 경우는 그가 아내의 의심을 사지 않고 늦게 들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좋은 '기회'였다 - 나는 또다른 기다림 속으로 빠져든 나머지 생각을 할 수도, 무언가를 바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보낸 오후 한나절의 뜨거운 순간이, 아이를 갖는 일이나 대회에서 입상하는 일, 그리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보다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순간은 단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이면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의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고통과 불안은 점점 커졌다. 시험을 치르고 나서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이 계속 흐르면 시험에 떨어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듯이,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짓곤 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 '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A는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엔가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낼 수도 있는 예민한 정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이제 '그의 삶'을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그에게 자신의 삶을 값지고 성공적인 것으로 이끄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의 신분을 밝힐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를 위해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내게 많은 제약을 강요했다.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낼 수도 없고, 선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가할 때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불평하지 않았다. ... 나는 그 사람의 몸이나 옷에 나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것은 그 사람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일을 피하게 하려는 배려인 동시에 그런 문제로 인해 그 사람이 내게서 떠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나름대로의 계산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그 사람이 아내를 동반하는 자리에서는 그 사람과 맞닥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 나는 그의 부인을 볼 때마다 그녀와 정사를 나누는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손안에 있는' 아내와 나누는 정사에 대해 그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런 장면을 연상할 때 느껴지는 고통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지금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특권일 수도 있는 질투 때문에 미칠 듯이 그 사람과 끝내버리기를 원하는 현재의 상황이.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 의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떠나는 바로 그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파왔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 차라리 방에 강도라도 들어와 나를 죽여주었으면 싶었다. 낮 동안에는 버려졌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하는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노력했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달쯤 지난 후부터 나는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 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고 그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이상은 독특한 억양을 가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 사람의 몸을 만질 수도 없다. 현실 속의 그 사람은 A라는 이니셜로 내 글 속에 씌여지고 있는 남자보다도 더 먼 곳에,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추운 도시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덧 4월이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A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일상의 작은 기쁨'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에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 그 사람이 예전처럼 그렇게 내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남들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A의 어떤 태도를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 관계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카페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연상의 유부녀와 지속적인 육체관계를 맺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초저녁에 그녀의 집에서 나올 때면, 남자다워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거리의 공기를 들이마시곤 해"라고 말했다. 아마 그때 A도 그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발견을 할 때면, 추억도 내게 주지 못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것을 붙잡기라도 한 듯 행복했다.


수많은 영상과 몸짓과 대화가 있었던 그 사람과의 첫날밤 이후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 ...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씌여지지 않은 열정적인 소설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그 사람이 나를 찾아온 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게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 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 내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내 열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었고, 지난 2년 동안 내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지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역자후기(최정수): 이 소설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1991년) 프랑스 독서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었다. 르노도 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외국 유부남과 가진 불륜 체험이 거의 사실 그대로 고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파란을 일으키기도 어려운 일인데, 이 작품은 몇 년 뒤 또 한번의 파란을 몰고 온다. <단순한 열정>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독자로서 작가인 아니 에르노를 만나고 그녀의 애인이 된, 그녀보다 33세 연하인 필립 빌랭이라는 청년이 그녀와의 5년간의 사랑을 <단순한 열정>의 문체까지 거의 그대로 옮겨 <포옹>이라는 소설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 어쨌거나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번역하는 내내 사랑이란 결국 기억이고,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쩌면 기억에 관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온통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고 환기시킨다. 하지만 머지않아 모든게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소중했던 사랑의 기억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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