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빠지는 함정, 즉 자기 분야에서 가능한 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문제였다. 한때 나는 그 기대치를 채우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물론 노력만큼 결과가 따르진 않았다. 갈등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 기대치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자 놀랍도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들의 평가에도 예전처럼 민감해지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도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전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유로움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자신만 더 상처받는다고 여기는 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높은 기대치도 한몫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대방은 나한테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기대치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물론 가정에서조차 그런 기대치가 채워지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방은 내가 아니다. ... 어떤 경우에도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내가 원하는 만큼 내 욕구를 헤아리고 내 기대치를 채워줄 사람은 없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로이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지혜다" 세네카의 말이다.


죽는 날까지 나는 나 자신과 동행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자신을 수용하는 연습을 하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었고, 그 중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었고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고 편하게 생각하자. 그리고 이제부터 다만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들을 조금씩 고쳐나간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다 보면 훨씬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날 이 올 것이다.


우리가 "나는 진심이었어"라는 말을 쓸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자. 대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다.  (자매품: "솔직히 말해서")


그녀를 보며 기욤 뮈소가 책에 쓴 문장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건 그들이 다 지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자신은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남에게 하듯이 나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자신에게도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 역시 그냥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분규를 일으키는 것은 간교함이나 사악함보다는 오히려 오해와 태만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압도당해 시도도 해보기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치는 셈이었다. ... 그대로 가다가는 이윽고 세상이 다 자신을 거부한다고 믿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폴 오스터의 말처럼 "일단 자신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면 다른 사람 모두가 자기에게 반감을 품는다고 믿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실패로 얼룩진 과거일지라도 내가 어떻게 마음먹냐에 따라 성공의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떤 실패든 그것은 하느님이 내 삶을 위해 마련한 계획이 다른 옷을 입고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습된 낙관주의>의 저자 마틴 셀리그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하려면 인내력이, 다시 말해 실패를 겪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난 낙관적 언어 습관이 바로 인내력의 열쇠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로 좌중을 웃길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며 좋아했다.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경수씨 역시 기분이 들뜨곤 했다. 어느 때는 오버해서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남들 비위를 맞출 때도 있었다. 늦은 밤 잠자리에서 자신의 그런 행동이 불쑥 떠오를 때면 자괴감에 우울해지곤 했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내고 싶거든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되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에서 변하지 않는 또 하나의 법칙이 있다. 아무리 해도 서로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 어떻게 해도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단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런 일은 누구나 있잖아요? 일생에 한 번쯤은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지는 일 말예요.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역시 그런 상대가 있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경우, 상대방도 이쪽과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그의 말대로다. 내가 상대방과 맞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쪽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를 밀어낼 준비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굳이 애쓰지 말고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결국은 소중한 사람의 손을 찾아 그 손을 꼭 잡고 있기 위해서, 오직 그러기 위해서 우린 이 싱겁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럭저럭 살고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매너라는 것은 한 사람의 가치관의 총합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가치관도 올바로 정립되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열린 마음, 균형 잡힌 시각, 관용과 신중함, 공평함과 용기를 갖추고 있다면 일부러 매너 있는 태도를 보이고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품위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도 한 마디 보태고 있다. "나쁜 매너는 모든 것을 졸렬하게 만든다. 심지어 정의와 이성까지도. 그러나 세련된 매너는 모든 것의 부족을 메운다. ...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 ... 작가 폴 오스터는 자신의 책에서 그런 매너를 가진 사람을 '파란팀'이라고 불렀다. 뛰어난 유머감각, 삶의 아이러니를 즐기고 터무니없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 어느 정도의 겸손함과 신중함,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절, 너그러운 마음씨가 있다면 그는 누구라도 파란 팀이 될 자격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대개는 상대방이 나로 하여금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기에 나는 그와 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 <권력의 법칙>을 쓴 로버트 그린은 한술 더 떠서 웬만하면 상대방보다 멍청하게 보이라고까지 권유하고 있다. ..."상대가 당신보다 똑똑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어라. 심지어 약간 바보처럼 굴어라. 그러면 상대는 자신이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풀어버릴 것이다."


나서지 않아도 좋을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나서는 성격을 심리학 용어로 '과관여 타입'이라고 하는데 나는 확실히 이 타입에 속했던 것이다. 덕분에 사서 하는 걱정이 늘 한 트럭분은 되는데, 사실 당사자인 나 자신도 그러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나와 같은 타입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있다면 바로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가 되어야 하리라. ... 지나친 도움을 주고자 나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심리 때문이다. '과연 내 도움 없이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겠어?' 하는 불신이 원인인 것이다. 그와 같은 불신은 타인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지배욕구 또한 강한데서 기인한다. ... 자기 식대로 상대방을 도와주고 나서는 감사해하지 않는다며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상처 받기도 한다. 


그 사람의 평판이 어떠하든 내게 잘 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부탁을 거절하면 안 좋은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개인에게는 양심이 있지만 집단에게는 양심이 없다." - 키르케고르


영어에서 꼼꼼함을 의미하는 단어인 'meticulous'는 '두렵다'는 의미의 라틴어 '메티큘로수스(meticulosus)'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 공자


"욕망을 버리기엔 너무 젊고 놀기엔 너무 늙었다." - 괴테


영국 작가 마크 해먼은 말했다. "세상 그 어떤 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태도,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들은 늙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기분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분 나쁜 채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정말 이렇게 기분이 나빠야 하는 상황인지 살피기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우울감은 자기 자신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것' - 프로이트


우린 흔히 불안하기 때문에 더 불안해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더 우울해한다. 그러다 보면 마치 눈덩이가 커지듯이 감정의 증폭이 일어난다. 그럴 때는 객관적으로 감정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돈이 없다. 나는 돈 벌러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대신 왜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사냐는 둥, 왜 세상은 물질지상주의냐는 둥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자신이 마치 대단한 철학자나 된 것처럼 군다면 그것은 일종의 현실도피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인생의 진짜 문제에 추상적인 생각을 부여해 문제 해결을 회피하는 것을 '가짜 철학적 경향'이라고 한다. ... 가짜 철학을 논하는 사람ㄷㄹ 대부분은 심리적으로 매우 많은 것을 바란다. 특히 성공이나 경제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은 누구보다도 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추구하고 달성할 자신감은 없다. 그러다 보니 포도가 시다고 평가절하하는 여우처럼 '성공에 매달리는 건 가치 없고 치졸한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내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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