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남자의 연애사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사랑을 뜻하는 스페인 말이 'amor'이다. 'mor'는 죽음, 'a'는 저항하다, 사랑은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 단어를 알고 나서야 독한 불면과 눈물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이 거듭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의 연애사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Amor Fati (아모르 파티)'라는 말,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는 말이다. 요즈음 책 속에서 꽤나 많이 인용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이 말 덩어리 자체를 기억해왔을 뿐이었는데, 사랑을 뜻하는 'amor'의 어원이 '죽음'과 '저항하다'에서 왔다는 것을 이번에야 처음 알았다. 말의 어원을 아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옛날의 사람들의 인식이 담겨있기 때문인데, 그 오래전부터 '사랑'을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로 인식해왔다니, 한마디로 사랑은 '삶' 자체가 아닌가.

이 책, 한창훈 작가의 『그 남자의 연애사』는 바로 이전에 포스팅을 한 방현희 작가의 『로스트 인 서울』과 상반되는 부분이 많다. 두 작품 모두 단편 작품들을 엮어놓은 소설집이기는 하지만, 삶을 다루는 배경 자체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로스트 인 서울』에서는 현대사회의 '도시'가 작품의 주요 공간적 배경, 장소였다면 『그 남자의 연애사』는 바다에 둘러싸인 어촌, 작은 섬마을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된다. 여성 작가가 쓴 도시 이야기를 읽다가, 남성 작가가 쓴 섬마을 이야기로 넘어와 읽게되니 소설을 읽는 묘미는 두 배가 된다. (앞으로 책을 읽을 때에는 무작정 읽기보다는 이렇게 선택적으로 읽기도 해야겠다.)
바다, 어촌마을, 작은 섬마을. 같은 바다라지만, 피서철이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해수욕장과는 거리가 멀다. 주민도 몇 안되는 한적한 분위기의 작은 섬마을은 도시 생활에 있어서 피난지, 탈출구가 되어준다. 도시 속 복잡함과 소음 속에서 벗어나 자연속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듯하여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늘 가고 싶은 여행지로 꿈꾸는 1순위가 되고는 한다.
그러나 장기간 머무르는 것은 자신이 없다. 도시에서 쭉 살아온 이들에게 인적 드문 섬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라고 하면 잘 버틸 이가 몇이나 될까. 한적함과 고요함, 잔잔함, 여유로움은 시간이 지나 모두 지루함, 쓸쓸함, 외로움, 고독함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한창훈 작가의 『그 남자의 연애사』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여러 문예지에 실린 그의 단편 작품들을 모아 엮어낸 것으로, <그 남자의 연애사>, <뭐라 말 못 할 사랑>, <발>, <애생은 이렇게>, <내 사랑 개시>, <판녀>, <무적이 운다, 가라>, <그 여자의 연애사>, <그 악사의 연애사> 등의 작품들로 이루어져있다.
모두 어촌이나 섬마을이 배경인데, 흘러가는 인연이든, 지겹게 붙어있는 인연이든 그곳에도 어김없이 '사랑'은 존재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가 말하는 사랑은 가벼운 것, 무거운 것 가리지 않고 잘 받아 먹는다. 한없이 쓸쓸하게 만들면 어떻고, 불타 없어질듯 뜨거우면 어떤가. 그래도 사랑이 아닌가. 어쨌든 내가 죽음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니까. 지나간 숱한 사랑 이야기를 파도를 안주삼아 술 한 잔에 흘려보낸다. 들어줄 이만 있다면, 다시금,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사랑이야기 아닐까.
'저쪽에서 봄바람이 부는가 싶은데 그만 내 가슴속에 꽃이 피어버리는 것. 쌍방이 그러한 것. 이쪽에서 마늘을 까기 시작하는데 저쪽에는 벌써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 그것 또한 서로 그러한 것. 그게 사랑 아닌가.'
- <그 남자의 연애사> 中
'해가 지는 풍경이 없다면 사람은 좀 덜 다치고 덜 한숨 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생은 그런 것들이 좋다. 바다 위로 지는 노을, 아침의 맑은 기운, 따뜻한 봄 날씨, 동박새 우는 소리, 벼랑에 핀 나리꽃…… 따져보면 사랑하는 대부분의 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이 늘 그런 것처럼 사랑은 소유와 아무 상관 없다.'
'술과 사랑. 그것 없으면 섬에서는 못 산다. 그것은 어쩌면 섬에서 사람이 살아남는 법인지도 모른다.'
- <애생은 이렇게> 中
'사람이 그렇게 안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하고 슝, 사라진다면. 최소한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반듯하게, 단정하게 눈감고 가면 보기에도 좋을 것인데.'
- <무적이 운다, 가라> 中
'그 나이 때의 연애는 길 걷다가 만난 꽃밭 같은 거였다. 보고 있으면 좋지만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아도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그 악사(樂士)의 연애사> 中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의 글을 또렷하게 구분해낼 수는 없겠지만, 또 일반화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느낌을 찾아본다면 여성작가는 인물의 내면을 거침없이 상세하게 서술하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반면, 남성작가는 인물을 둘러싼 외부적인 것을 깊은 관찰력으로 둘러보고 주변세계를 잘 구축해낸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훈 작가가 그러했다. 작가는 인물 주변에 흐르는 공기를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있다. 그 덕에 잘 구축된 작품 속 세계에서 우리는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를 이해하도록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힘, 그것이 바로 한창훈 작가의 필력의 한 부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