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신문을 읽으면서 하고 많은 기사들 가운데 한 칼럼으로 눈길이 쏠렸다.‘홍세화씨 열기의 뒤안길’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글이었는데, 홍세화씨에게 20년만에 일시 귀국해 조국을 돌아 본 소감을 물었을 때 그가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마음이 살쪘더구먼, 필요 이상으로…”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나도 피둥피둥 마음살이 쪄올라 기름이 끼어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내가 대학 새내기였을 때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읽으면서 기억에 뿌리를 깊히 내린 것이 바로‘똘레랑스’였다. 그 때도 한 쪽 발은 프랑스라는 나라에 걸치고, 또 한 쪽 발은 우리나라에 걸쳐 놓고 책을 읽으면서 그 놈의‘똘레랑스’라는 것을 왜 부러워만 하나, 우리라고 못할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모든 가치관에 대한 평가를 보류당하고 입시에만 매달리다가 대학이란 곳에 들어온 때이긴 했지만 나에겐 내가 만들어 가고 바꾸어 나갈 자유와 문화에 대한 기대가 가슴 가득 했었다.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병이 되어 있다. 그리고 문화비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파리에서 전해 온 이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었다.‘두번째 젊은이’로서 기쁘게 말이다. 이 책에 대한 비판을 원한다는‘첫번째 젊은이’의 당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서도 결국 끝에 남는 것은 책에 대한 것보다 이 사회에 대한 처절한 비판이었다. 물론 결코 나 혼자로서는 꿈꿀 수 없는 전망에 대한 바램과 함께 한 비판이었다.

이 책에서 똘레랑스 말고 눈여겨 본 부분은 사회정의에 관해 써 놓은 부분이었다. 솔직히 이 말은 내게 낯선 것이기도 했다. 어떤 사건에도 질서(안보)라는 잣대로 들이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은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한국에서‘사회정의’나‘연대’라는 말은 듣기 어려운 대신에,‘고통분담’이라는 말은 대 유행”하면서‘아이엠이프 이후 어려운 시기였는데도 1년 동안 고위관료와 국회의원의 재산이 늘어났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러한 이해 불가능의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드러나고 있지만 그때 그때에 맞는 맨홀 뚜껑 속으로 묻혀 버리는 것 같다.

우리도 사회구성원들의 안간다운 생활, 인권과 권리를 인정해 주고 이를 삶의 곳곳에 반영하고 실천해 나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도 질서와 안보 논리를 찍어낼 기득권층으로의 편입을 꿈꾸며 공부하고 있을 고시촌의 수많은 젊은이들. 물론 그런 이들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위한 사회의 정의는 어떻게 실천해 나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는 이들이 하나하나 모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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