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는 죽지 않는다
최승호 지음 / 도요새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슬픈 돼지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아 젖을 물리던 어미돼지가 하루는 돌
연 미친 듯이 새끼들을 다 물어 죽여버렸다. 이 이해할 수 없
는 돼지우리 안의 대사건에 주인은 처음엔 슬퍼하다가 나중
에는 화가 났다. 돼지 여덟 마리면 돈이 얼만데. 그 돈을 다
거름으로 만들어버렸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또
어미돼지를 잡을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는데, 주인은 손수 돼지
목을 땄다. 화가 크게 난 사람은 거의 미치광이와 다름없다.
그 광기를 조심해야 한다. 나중에야 발견되었지만 어미돼지
의 어금니엔 굵은 대못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말 못하는 짐
승이었으니 고통과 안타까움이 더 심했을 것이다. 그뒤로 동
네 사람들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망가진 못이나 바늘 같은 쇠
붙이를 넣지 않기로 반상회에서 약속했다고 하는데, 주인은
불쌍한 돼지머리를 안고 슬피울다가, 이번엔 목을 딸 수도
없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가 책에서 이 詩를 처음 만났을 때 마지막 부분을 읽고 온몸에 소름 같은 게 돋는 듯 했습니다. 드러난 그대로 이 詩에서 생태 문제를 읽어 낼 수도 있겠고요. 제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 '어리석음'이라는 낱말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이란 말이 '상처'라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이 우주에서 인연 맺고 관계하는 것들에 나도 모르게 저질러왔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선집을 만나면 '사람'이라 불리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부끄러워지고 낮아져야 할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