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구덩이 얘기를 하자면
엠마 아드보게 지음, 이유진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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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를 하다 코가 수영장 바닥과 인사를 하는 바람에 코피가 났다. 모래밭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슬라이딩하며 넘어져 온 다리가 홀라당 까졌다. 울타리를 넘어다니다 걸려 넘어져 입속이 찢어졌다. 묘기 그네를 타다가 수직으로 엎어져 분수토를 했다. 이 모든 사례는 여럿이 놀아도 매번 혼자만 크게 다치는 우리집 아이에게 있었던 일이다. 연고와 반창고를 챙기는 것으로는 모자란 위험 상황들을 적잖이 당하다 보니 노는 아이를 보면 신경부터 곤두섰다. 붕~ 날아서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치던 날, 큰 아이들 축구공 슈팅에 갈비뼈를 맞은 날에도 아이는 늘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위태롭게 놀고 있었다. 반사신경은 물론 순발력, 균형감 모두 물려주지 못했기에 노파심에 쫓아다니며 단속을 해도 아이는 다시 가장 짜릿한 곳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다치고 아프며 자란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내가 늘상 안고 있었던 불안은 가정에서 비롯된 큰 사고에 대한 염려였다. 자칫 잘못해서 어느 한곳에 장애라도 생기는 사고가 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던 내게 남편의 한마디는 명징했다 “그렇다면 너는 운전대부터 놓으렴!”

급기야 놀이터 금지령을 내렸지만 아이에 정복의지와 놀이욕구는 당연히 꺽이지 않았고 애초에 지속가능한 협박이 아니었다. 신신당부는 물론 감언이설도 통하지 않았다. 그건 너의 책임이니 아픔까지 너의 몫이라고 매몰차게 대응도 했다가, 상처가 났을 때에 대수롭지 않게 무관심으로 맞대응하며 아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게도 해보았다. 그럴수록 골탕이라도 먹이듯 더욱 위태롭게 몸을 썼고 다치기를 반복했다. 그즈음 때마침 친구에 권유로 어린이 클라이밍 센터를 찾았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곡예에 가까운 그네를 타는 것과 클라이밍 어려운 코스를 해내는 것의 차이점과 한계를 배웠다.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아이는 기구들을 사용해보며 잠재력이 얼마만큼 인지 측정하고, 포기와 실패를 경계를 가늠하며 적당함을 조절해 나갔다. 나는 다시 아이에게 놀이에 운용을 맡겨보기로 결심했고 “이것도 못해?” 라는 상대방의 자극에도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어, 나는 아직 거기까진 못해. 나와 너는 잘 할 수 있는 것이 달라. 내가 하기엔 어렵고 위험한 것 같아!”

아이들은 왜 안되는지 궁금할 것이고, 어른들은 왜 하필 그곳인지 궁금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놀잇감들이 어른들에겐 위태롭고 불안한 소재가 된다. 어른들은 상처 입을 것이 두렵고 아이들은 다칠 상황부터 예단하지 않는다. 고통이 학습된 어른은 모면을 택하고 싶고, 아픔을 찰나의 순간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즐거움에 더 큰 용기를 낸다. 아이는 괜찮냐는 친구들에 위로까지도 즐기는 것 같지만 어른들은 상처를 보며 쓰라림을 간접 경험하듯 측은하게 바라본다. 서서히 아물어가는 시간 속에 고통이 무뎌지는 것을 모두 알지만 어른은 고통에 아이들은 무뎌지는 것에 집중한다. 이 두 권의 책은 자유롭게 놀 권리와 더불어 놀이에 모든 책임 또한 아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연속적으로 들려준다. 아이들이 고배를 맛 볼지는 몰라도 그것이 아이들에 놀이에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무릇, 상처는 아물고 딱지는 떨어진다.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 흉터가 남지만 그 흉터도 차츰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가 한 문장을 거들어 덧댄다. "아픈 기억은 남아있지만 괜찮아."라고. 상처가 두려워 소극적이 되어버린 어른들에 마음도, 일어나지도 않을 통증보다 놀이의 행복감이 우선인 아이들에 마음도 간지럽히는 책을 만났다 #내딱지얘기를하자면 #그구덩이얘기를하자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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