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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니엘 켈만, <명예>, 허울 속으로
휴대폰을 쓰지 않았을 때, 휴대폰에 집착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저렇게 계속 쳐다보는 거지? 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거리는 거지? 자기 얼굴이라도 되는 건가? 나는 휴대폰이 생기더라도 저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을 처음 개통했고, 나는 내 손바닥 위에 얹은 장난감으로 자꾸만 뭔가를 확인하려고 했다. 타인이 보낸 메시지, 타인의 얼굴, 메시지에 드러난 뉘앙스. 때로는 전화기 밖에서 행동하고 있을 타인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환풍구를 찾은 듯 했다. 반면에 나를 발견할 여유는 점차 없어졌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와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줬으니까. 다니엘 켈만이 쓴 <명예>는 그런 나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명예>는 내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들을 조롱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 자신까지도.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매우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이다. 휴대폰, 인터넷, 컴퓨터 등 소위 없어서 안 될 정보수단이 인간의 정체성을 얼마나 흐려놓았는지를 위트 있게 보여준다. 9개의 에피소드 중 그와 관련한 대표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첫 번째 이야기, 「목소리」. 여기는 <명예>라는 소설의 시작점이 된다. 휴대전화기를 구입한 에블링은 잘못 걸려온 전화를 계속 받게 된다. 참다 못한 그는 자신이 랄프인 척 하며 그 나름대로의 게임을 한다. 그러나 과연 랄프인 ‘척’ 하는 건지 자신이 랄프라고 ‘착각’하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려한다.
네 번째 이야기, 「탈출구」. 유명한 배우 랄프는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자기 인생을 망쳐놓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랄프 보다 더 랄프 같은 남자가 나타나 기존에 누렸던 인생을 빼앗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확고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저 현 상황에 순응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동양」.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세계와 영 딴판인 세계에 고립된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게 통하지 않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붙잡지 못 한다.
일곱 번 째 이야기, 「토론에 글 올리기」. 인터넷 커뮤니티 속에서만 생활하던 인터넷 중독자몰비츠는 급기야 현실과 소설 속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 직장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보수단에 의해 흐려지는 정체성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작가에게 반항을 하고,(「로잘리에 죽으러 가다」) 저명한 자기계발서 작가가 평소 보여주던 모습과 다른 생각을 품기도 한다.(「수녀원장에게 답장하다」) 또한 「위험 속에서」에 나오는 상황처럼 소설과 현실, 소설 속 소설, 어느 게 ‘진짜’인지 모호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작가는 (상투적으로 정리하자면)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위험 속에서」 중에서)
하지만 현대인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물론, 자기 자신 조차 말끔하게 분리하고 정리하지 못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책 속의 목차와 페이지로 정리하는 게 오히려 더 쉽다.
휴대폰을 사용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더 이상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거나 연락할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이런, 내 관계는 허울뿐이었나?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허울뿐인 건가? 이런 조바심은 휴대폰을 사용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명예라는 건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붙들어 매는 보이지 않는 전자파 같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