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늘어가는 게 있을수록 점차 살아갈 날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하고 충족하려 들지만 만족하기 쉽지 않다. 물질과 명예가 높아 진다해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소요한 시간과 젊음이 나중에 더욱 아쉬울 것이다. 리사 프라이스의 소설 <스타터스>는 이렇듯 젊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주로 자신의 자금을 젊음으로 바꿀 수 있는-을 위해 정말 젊음을 대여해주는 ‘바디 뱅크’와 그에 대항하여 진실을 파헤치는 ‘켈리’,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움직이는 인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밝지 않은 미래에 생물학 전쟁으로 중장년층이 모두 자취를 감춘다. 대신 스타터스라 불리는 10대들과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만이 살아남는다. 그 밖에 집행관, 우호주의자, 이탈자 등과 같이 다양한 이름을 가진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살아간다. 이 세계에서 일자리는 모두 노인들이 갖고 미성년자들은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스타터스들은 거리를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던 중 ‘켈리’는 몸이 편치 않은 동생 ‘타일러’를 위해 ‘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이곳은 다시 젊어지고 싶어 하는 부유한 엔더에게 고가의 금액을 받고 연고지가 없는 스타터스의 몸을 불법적으로 대여해 주는 곳이다. ‘바디 뱅크’에서 ‘렌터’의 마음에 드는 몸이 되기 위해 켈리는 완벽에 가까운 몸으로 바꾼다. 이른바 ‘성형수술’이란 걸 하는 셈이다. 그러잖아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던 ‘켈리’는 ‘바디 뱅크’를 다녀간 후 더욱 의미심장한 일들을 겪게 된다.

 

 켈리가 바디 뱅크의 음모를 캐고 동생을 찾아다니는 동안 독자는 우리가 현재 직간접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문제들은 잠시 현재 일어나다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논쟁거리일 것이다. 한두 가지만 꼭 집어 말하기 어렵다. 그 중 ‘바디 뱅크’를 통해 대여하는 (살아 있는 인간의) 젊은 육체.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사람이 돈을 주고 사람의 육체를 대여하면서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존재적 가치 또한 소멸해버린다. 육체를 빌려준다는 건 본래 있어야 할 정신조차 어딘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을 대여한다는 건 자기 존재를 어딘가에 방치시키는 게 아닐까. 자기 몸을 ‘렌터’라고 하는 대여자에게 몸을 빌려준 켈리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지 못 해 불안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의 몸을 빌려준다는 독특한 소재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엔더와 스타터스의 관계이다. 힘없는 노인들보다 더 젊고 신체적으로 활력이 있는 청소년이 주도권을 잡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스타터스들이 오히려 엔더에게 압력을 받는다. 또한 통상적으로 엔더로부터 스타터스를 보호해야할 의무 혹은 보호자로서 책임감 등을 기대할 법 한데 그런 장면도 흔치 않다. 아마 작품 속 배경이 어두운 미래, 디스토피아라고 하는 보다 냉혹한 시대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거니 싶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접하는, 통칭 ‘현대사회’라는 곳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 하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세요, 당신? 2
이종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말하지 못 한 이야기, 드러내지 못한 진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답답하겠지만 ‘언젠가 뜻을 전할 날이 오겠지.’하고 답답한 마음을 묻어두기도 합니다. 그건 우리가 내일도 살 수 있고 언제든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회가 항상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엄마에게 드리지 못 한 선물을 언젠가는 드릴 수 있겠지, 사랑한다는 말 혹은 헤어지자는 말을 굳이 지금 하지 않더라도 조만간 하면 되겠지.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살아있는 지금이라면, 금방 다시 올 거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뜻하지 않게 죽는다면, 그래서 가슴 속에 응어리 진 채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상을 지내지 못 한다면 얼마나 목이 멜까요. 이종호 작가의 <누구세요, 당신?>은 이런 물음에서 출발하여 사람의 운명, 인연을 이야기 합니다.

 <누구세요, 당신?>은 기본적으로 희진이라는 여주인공과 그녀를 돕는 정옥 이모라는 귀신, 선일과 진만 퇴마사 콤비 그리고 그녀가 빌린 몸의 주인 지영의 가족, 영수와 지호, 가수 성우와 매니저 태진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전개됩니다. 다들 한 명이라도 빼먹으면 안 될 정도로 개성 있고 중요한 캐릭터들이죠. 그 중에 제가 보기에 가장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이끄는 캐릭터를 간단히 소개해드립니다.

 희진. 남부러울 것도 거칠 것도 없던 양희진의 인생은 임신을 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가수인 남자 친구 성우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만 별 도움을 얻지 못 하고 고민만 하다가 교통사고로 처녀귀신이 되어 버립니다. 한을 풀지 못 하고 이승을 떠돌던 그녀는 무슨 일인지 식물인간으로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는 지영의 몸으로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영은 영수라는 남편과 지호라는 아이를 둔 유부녀란 말이죠. 희진은 살았을 때 무녀였던 정옥 이모의 도움을 받으며 영수와 지호라는 낯선 가족을 알아갑니다.

 선일과 진만. 온갖 한량 짓을 하던 선일은 나름대로 마음잡고 퇴마사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어찌 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솔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담 좋고 가식 없는 인물이지만 언행이 가벼워 주위 사람이 언짢아하기도 하죠. 그런 선일에게 퇴마사의 피를 이은 진만이 나타납니다. 성심이 고운 진만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혹은 이용해 먹는- 선일을 스승으로 여기며 원혼을 달래기도 하고 퇴마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얼핏 이 콤비가 천방지축으로 활동하는 것 같지만 우연한 인연으로 희진과 정옥 이모와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습니다.

 책에는 이 밖에도 소개해드리지 못 한 여러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고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서로 인연을 맺어갑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아니면 이루지 못 한 일을 이루기 위해 고심하기도 하죠. 믿었던 사람이 자기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죽고 나서 알게 된 허탈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책을 읽고 가장 깊이 느낀 건 우여곡절 끝에 깨달은 사랑입니다. 겉모습에 반하지 않고 차츰차츰 상대방을 알아가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깨달은 뒤 얻게 된 사랑 말입니다. 조만간 할 수 있겠지, 언젠가 내 마음에 똑 드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 하지 않아도 되겠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산다는 건 이런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번 생이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웜 바디스 블랙 로맨스 클럽
아이작 마리온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작 마리온의 <웜 바디스 Warm Bodies>에 대하여

 

 나는 종종 노래를 부르거나 얘기를 하다 뜬금없는 목소릴 낼 때가 있다. 의도치 않게 음이탈을 하기도 하고 가래가 끓기도 하는 등. 그럴 때면 낯이 저절로 뜨거워진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았을까 싶어서 내가 내지 않은 척 하기도 한다. 이 소리는 내 소리가 아니라고 묵묵히 거부한다. 엄연히 내 안에서 나온 녀석임에도 애써 타자화(他者化) 시켜버린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다가 뚥, 뿔롹하고 진동을 내다 걸린 사람처럼, 숨기고 싶은 본래 야성을 들킨 고양이처럼. 어쩌면 좀비라는 녀석들도 내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좀비가 아닌 ‘인간’이란 존재가- 잘못 내지른 소리가 아닐까.

 아이작 마리온의 <웜 바디스>는 매우 특별한 좀비소설이다. 동시에 R은 지금껏 보아 온 어떤 좀비들보다 특별하다. 대부분 좀비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인간이 주인공이었다면 <웜 바디스>는 R이라는 ‘사유하는’ 좀비가 화자로 등장하고 ‘줄리’라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다소 신선한 내용을 다룬다. 이야기는 어느 날 평소 여러 모로 깊은 생각을 하는 R이 ‘페리’의 뇌를 먹은 뒤 그의 과거를 공유하고, ‘줄리’를 지키기로 결심하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R과 줄리 사이에 페리의 기억을 여러 장면으로 삽입을 하면서 두 남녀가 공유한 기억을 이어주기도 한다. R이라는 일인칭 화자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를 페리의 기억을 통해 확장시켜나가는 방법을 선택한 건 매우 탁월한 방식이다. 아이작 마리온은 자칫 기존에 범류한 좀비물의 아류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순간에 벗어던지게 만든다. 작품을 읽을수록 작가에 대한 신뢰도가 쌓여갔다. 그러한 신뢰도의 근간은 R과 줄리, 그리고 페리 세 인물을 중심으로 M, 그리지오 등등 다양한 인물들과 겪는 에피소드를 재치있고 로맨틱하면서 감동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여러 가지 특징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점은 좀비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랜드 오브 데드>와 같은 좀비 영화에서 좀비가 인간의 행위를 유사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또 드라마 <워킹 데드>에서는 좀비라는 존재의 위협이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들의 범죄행위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웜 바디스>는 그보다 더 나아가서 겉모습이나 생물학적인 조건만 다를 뿐 결혼, 육아, 교육 등 좀비 이전에 기억하는 인간공동체를 좀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좀비를 그려내고 있지만 사회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평화로운 결혼생활 대신 R의 아내가 외도를 하는 모습, 즐거운 학교생활 대신 죽기살기로 싸워 이겨야 하는 삶의 방식을 학교에서 배우는 모습들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인간군상을 좀비를 포착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좀비는 이렇듯 인간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패한 피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킬박사와 미스터 하이드가 한 몸에 있듯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좀비의 대립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소설 <웜 바디스>에서 말하는 인간과 좀비의 대립과 화해는 백신도, 마법이나 초능력도 아닌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너무나도 단순해서 지금 우리가 쉽게 잊는 것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니엘 켈만, <명예>, 허울 속으로

 

 휴대폰을 쓰지 않았을 때, 휴대폰에 집착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저렇게 계속 쳐다보는 거지? 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거리는 거지? 자기 얼굴이라도 되는 건가? 나는 휴대폰이 생기더라도 저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을 처음 개통했고, 나는 내 손바닥 위에 얹은 장난감으로 자꾸만 뭔가를 확인하려고 했다. 타인이 보낸 메시지, 타인의 얼굴, 메시지에 드러난 뉘앙스. 때로는 전화기 밖에서 행동하고 있을 타인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환풍구를 찾은 듯 했다. 반면에 나를 발견할 여유는 점차 없어졌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와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줬으니까. 다니엘 켈만이 쓴 <명예>는 그런 나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명예>는 내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들을 조롱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 자신까지도.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매우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이다. 휴대폰, 인터넷, 컴퓨터 등 소위 없어서 안 될 정보수단이 인간의 정체성을 얼마나 흐려놓았는지를 위트 있게 보여준다. 9개의 에피소드 중 그와 관련한 대표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첫 번째 이야기, 목소리. 여기는 <명예>라는 소설의 시작점이 된다. 휴대전화기를 구입한 에블링은 잘못 걸려온 전화를 계속 받게 된다. 참다 못한 그는 자신이 랄프인 척 하며 그 나름대로의 게임을 한다. 그러나 과연 랄프인 하는 건지 자신이 랄프라고 착각하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려한다.

 네 번째 이야기, 탈출구. 유명한 배우 랄프는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자기 인생을 망쳐놓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랄프 보다 더 랄프 같은 남자가 나타나 기존에 누렸던 인생을 빼앗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확고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저 현 상황에 순응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동양. 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세계와 영 딴판인 세계에 고립된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게 통하지 않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붙잡지 못 한다.

 일곱 번 째 이야기, 토론에 글 올리기. 인터넷 커뮤니티 속에서만 생활하던 인터넷 중독자몰비츠는 급기야 현실과 소설 속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 직장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보수단에 의해 흐려지는 정체성만 보여주는 건 아니다.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작가에게 반항을 하고,(로잘리에 죽으러 가다) 저명한 자기계발서 작가가 평소 보여주던 모습과 다른 생각을 품기도 한다.(수녀원장에게 답장하다) 또한 위험 속에서에 나오는 상황처럼 소설과 현실, 소설 속 소설, 어느 게 진짜인지 모호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어쩌면 작가는 (상투적으로 정리하자면)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위험 속에서중에서)

 

 하지만 현대인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물론, 자기 자신 조차 말끔하게 분리하고 정리하지 못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책 속의 목차와 페이지로 정리하는 게 오히려 더 쉽다.

 

 휴대폰을 사용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더 이상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거나 연락할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이런, 내 관계는 허울뿐이었나?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허울뿐인 건가? 이런 조바심은 휴대폰을 사용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명예라는 건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붙들어 매는 보이지 않는 전자파 같은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0
리브카 갈첸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것이 생경하고 부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혹은 오랫동안 그러리라 예측이 가능한 상태에서 수시로 상태가 바뀌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안정감이 아닌 불안정감을 느낀다. 일기예보를 보면 종종 대기가 불안정하다는 표현을 접하곤 한다. 그 말은 외출 할 때 우산을 들고 가야 할지 선글라스를 끼고 가야 할지 확실히 가늠하기 힘들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대기불안정’이라는 표현은 비단 날씨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하고 같이 산 아내가 어느 날 ‘진짜’ 아내가 아니라는 의구심이 들 때, 남편은 정신적으로 갑작스런 기후변화를 겪게 된다. 리브카 갈첸의 <대기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이하 ‘대기불안정’)은 이렇듯 어떤 사람이 당연히 예측가능하다고 믿는 상태가 흐트러질 때 어떤 고민을 하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소설 <대기불안정>은 매일 보던 똑같은 사람이 전혀 낯선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정신분석가인 50대의 남자 레오 리벤슈타인은 아내 레마를 ‘자기가 평소에 알던’ 진짜 레마가 아니라고 무작정 의심한다. 그리고 그렇게 의심 하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만들며’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마침내 레오는 진짜 레마를 찾기 위해 만만찮은 여정을 떠난다. 그러한 동시에 불안정한 그의 심리상태에 어울리는 평범치 않은 인물들 -날씨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정신병 환자, 기록상 사망했다고 보이는 갈첸 박사, 레마의 어머니 등등- 과 사건들을 마주하며 레오는 점차 자신의 내부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복잡한 심리들은 기상학 이론들과 잘 어우러져 사람의 마음과 날씨가 닮아있다는 걸 보여준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연인, 혹은 배우자를 의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소 상대방의 태도가 미심쩍거나 상대방의 대인관계가 거슬린 적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이다. 레오는 여느 연인이 가질 법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는 정도를 넘어서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여기서 레오가 내세우는 증거들을 보면 언뜻 ‘그래서 진짜 레마가 아니라는 거로군’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하지만 이 남자가 하는 말은 어떻게 믿을 수 있지?’하고 자문해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레오가 부정하는 레마는 레마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이전부터 알고 있던 레마라는 존재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쉽게 말해 어느 대상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에 ‘없다’ 혹은 ‘아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주관적인 합리적 판단을 근거로 외부에 원인이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사랑 또는 마음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지 치밀한 심리묘사와 기상학 용어들을 이용해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인 분석’이라고 해서 분명한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도 말해준다.

 

* 특히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사람들: 수많은 정신분석가와 자신 또는 자신의 주변인의 정신분석을 의뢰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해 마음 속에 복잡한 미로만 만드는 현대인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