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김명순 외 지음, 이루카 엮고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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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캣책곳간에서 책을 제공받아 성실히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_ 김명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이자 시인)


세계 곳곳에 숨겨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어디에서 들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지난 4천 년간 역사를 통과해 온 대표시를, 세계 100명의 여성 시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초판 한정 양장본인 덧표지는 영국 유명 화가 데이비드 인쇼의 < 배드민턴 게임 >(1972~1973) 이라는 작품이다.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는 표지는 책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 여성인권이 낮았던 시대를 살아온 여성시인들이 늘 꿈꿔왔던 여유롭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책에는 고대 로마•그리스, 일본, 한국, 유럽, 중동, 남미, 아시아 국가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각국의 대표 여성 시인들이 시가 실려있다. 그 속에는 나혜석, 김명순, 히구치 이치요, 브론테 자매들, 조지 엘리엇, 루시 모드 몽고메리 등 유명한 작가들도 있으며,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시인들도 있다.


여성 인권이 낮았던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이 그 시대를 담담하게 이겨내거나, 때로는 격분하고 호소하는 시를 만나볼 수 있고, 내면의 고뇌와 상실도 만나볼 수 있다.

페이지를 펼치면, 왼쪽 면에는 에칭 스타일로 정교하게 복원한 시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 초상화가 매우 인상적이다. 단순히 시만 봤다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궁금했을 것 같은데, 그런 궁금증을 말끔히 사라지게 한다.


초상화 밑에는 시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록해두었고, 하단에는 왼쪽 면 시에 대한 해석이 적혀있다. 나는 왼쪽의 시를 읽고 나서 오른쪽 시인의 생애와 해석을 참고하며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시를 읽어보면 확실히 처음 느낌과 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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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가 마음에 들어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 몇 편을 소개하고 싶다.


- 섬세함은 약함이 아니다 -

우리 여자도 무장하고 단련하면,

모든 사내에게 얼마든지 맞설 수 있으리

우리에게도 손과 발과 심장이 있으니

여자는 부드럽고 섬세하니 약해 보여도

섬세한 사내가 강할 수 있고,

거친 남자가 겁보일 수 있잖은가.

여자들은 아직도 그걸 모르죠.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죽을 때까지 당신들과 싸울 수 있을 텐데.

- 베로니카 프랑코(1546 ~1591 ) p.34



위의 시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시인이자 지적인 고급 기녀였던 베로니카 프랑코의 시이다. 마법을 부렸다는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회부되는데, 변호사없이 스스로 적극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위의 시는 남성 시인이 베로니카를 음란한 창녀라고 비방하자, 그녀는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다는 시로 정면 응수했다.(책의 해설 요약)


앞 페이지부터 여러 여성시인들의 진취적인 시를 읽어나가다가, 위의 시를 읽고 내 마음속에 서서히 불붙던 불씨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온갖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당당함과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문장에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대범한 결의가 느껴졌다. 확신에 찬 시를 들은 상대 남성은 이미 반박할 힘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한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김명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여성의 글과 연애가 억압받던 시절에 기생 출신의 어머니 자식이라는 꼬리표와 그녀의 재능과 자유로움은 허용되지 않았다. 동시대 소설가들에게서 갖은 비방과 모욕을 견뎌내야했고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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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에게, 만약 내게 딸이 있다면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듯,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로 북적이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눈물보다는

쓴웃음이 더 어울리는 곳이란다.

지나친 의심은 가슴에 앙금을 쌓고,

지나친 믿음은 뒤늦은 후회를 부르지.

모든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도,

모든 남자의 가슴에 덕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렴.

안나 마리아 렝그렌 (1754 ~1817 )


나도 딸이 있다면 위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 시 안에는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자기 자신을 소중히 대하라는 조언도 들어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현명함을 가르쳐 주고 인간을 꿰뚫은 통찰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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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이의 곁에서 -

참으로 달콤하겠지, 오 나의 죽은 이여,

모든 수고를 내려놓고 두 손 모아 누워 있는 일은.

위대한 신비의 인장으로 봉인된

아무거도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 그 입술

평생의 사투가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참고 견디던 고단함도, 고통도.

두 눈은 감겨 다시는 뜨이지 않으리

황량한 새벽도, 쓸쓸한 밤도 두 번 다시 보지 않겠지.

느린 날갯짓이든 빠른 날갯짓이든, 그 모든 시간을 뒤로하고

참으로 달콤하겠지. 더없이 달콤할 거야.

- 이나 쿨브리스 (1841 ~1928 )


이나 쿨브리스는 미국에서 최초의 계관 시인이자 황금주의 문학적 어머니로 불린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적 야심을 접어두고, 그 속에서 서정적이고 절제된 시를 써낸 인물이다.

위의 시는 자신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고 반복된 상실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책의 내용 요약)


위의 시는 죽음을 달콤하다고 표현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혀 두렵지 않다. 상실을 경험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 너무 큰 비극을 겪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삶이 더 고통일 수 있음을 잘 드러낸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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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비가 내릴 것이다 -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땅에서 흙 내음이 피어오르고,

제비들이 반짝이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맴돌고,

밤이면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울어대고,

(...)

아무도 전쟁을 알지 못할 것이고,

마침내 전쟁이 끝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도, 나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새벽에 눈을 뜬 봄조차,

우리가 사라진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할 것이다.

- 사라 티스데일 (1884 ~1933 )


사라 티스데일은 퓰리처상의 전신인 컬럼비아 대학교 시문학상의 초대 수상자라고 한다. 이 시는 인간의 잔혹한 전쟁과 대조되는 자연의 평화롭고 무심한 영속성을 담담히 그렸다. (책의 내용 요약)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가는 가운데 인간도 예외일 수 없지만, 자연은 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속한다. 서로가 이기려고 하는 지독한 인간의 싸움이 자연 앞에서는 그저 헛된 일임을 너무도 잘 표현한 시였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대포 소리도 그저 잠시 스쳐갈 소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옛 시대의 진취적인 여성들의 치열하고 고된 삶이 시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사회적 모순과 억압에 펜을 들고 글로 맞서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모든 삶이 짧은 시 안에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메아리가 되어 조금씩 바뀌어 나갔을 것이다. 당차고 강인하게 세상과 맞선 시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실과 개인적인 아픔을 노래한 시들도 마음을 울렸다. 고독했던 내면의 소리를 시로 담아내기도 했고,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에 대한 깊은 사색도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시와 시인의 생애를 함께 만날 수 있어서, 시를 이해하기가 더 쉬웠고 시의 깊이와 서사를 알아가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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